- 05 Jan, 2026
아트가 나오고 난 후에야 보이는 기획의 허점
아트가 나오고 난 후에야 보이는 기획의 허점 프로토타입 단계의 착각 프로토타입 단계에서는 모든 게 괜찮아 보였다. 회색 박스에 숫자만 띄워놓고 밸런스 잡았다. 10발 쏘면 죽는다. 쿨타임 3초. 데미지 500. 모션 시간 0.8초. 엑셀에 정리된 숫자는 완벽했다. PD한테 보고했다. "밸런스 잡았습니다." 승인 받았다. QA 테스트도 통과. 프로그래머도 "구현 완료"라고 했다. 문제없었다. 그때까지는.아트 작업이 시작됐다. 캐릭터 원화 나왔다. 이펙트 들어갔다. 애니메이션 붙었다. UI 디자인 완성됐다. 그리고 빌드를 받았다. 실행했다. "어...?" 뭔가 이상했다. 프로토타입이랑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숫자는 똑같은데 게임이 달라 보였다. 시각적 피드백의 배신 가장 먼저 터진 건 타격감이었다. 회색 박스 때는 괜찮았다. 박스가 빨갛게 깜빡이고, 데미지 숫자 튀어나오고, 그걸로 충분했다. QA 테스터들도 "괜찮은데요?"라고 했다. 근데 최종 캐릭터 모델이 들어가니까 완전히 달랐다. 칼로 베는데 상대가 안 밀려난다. 그냥 서 있다. 피 튀는 이펙트는 화려한데 몸은 꿈쩍도 안 한다. 죽을 때도 그냥 스르륵 사라진다. "이거 맞은 거 맞아?" 유저 입장에서 그렇게 보일 게 뻔했다.TA한테 갔다. "적 밀려나게 해주세요." "기획서에 넉백 없던데요?" "...넣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럼 밸런스 다시 잡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넉백 거리, 시간, 그거 다 수치잖아요." 맞다. 넉백이 들어가면 공격 딜레이가 달라진다. 콤보 타이밍이 바뀐다. 밸런스 전체를 다시 봐야 한다. 프로토타입 단계에서는 생각도 못 했던 일이다. UI 배치의 함정 UI도 문제였다. 기획서에 UI 배치도 그렸다. 와이어프레임 깔끔하게 정리했다. 체력바 위쪽, 스킬 아이콘 아래쪽, 미니맵 오른쪽 위. 논리적으로 완벽했다. 프로토타입 빌드에서는 괜찮았다. 단순한 도형이랑 텍스트니까. 시야 방해 안 됐다. 최종 UI 디자인 들어갔다. 화려했다. 예뻤다. 아트팀이 정성 들여서 만들었다. 근데 게임이 안 보였다. 체력바가 너무 화려해서 적 공격 모션이 안 보였다. 스킬 아이콘이 반짝거려서 정작 쿨타임이 안 보였다. 미니맵 테두리가 두꺼워서 적 위치 파악이 늦었다. "디자인은 이쁜데 게임이 안 되는데요?" UI 디자이너한테 말했다. "좀 단순하게 해주세요." "기획서대로 만든 건데요?" "...기획서를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또 작업 돌아간다. 일정 밀린다. 캐릭터 크기 문제 제일 황당했던 건 캐릭터 크기였다. 기획서에 썼다. "캐릭터 키 1.8m 기준". 캡슐 콜라이더로 테스트했다. 맵 디자인도 그 크기 기준으로 했다. 최종 캐릭터 모델이 들어왔다. 원화가 너무 멋있었다. 갑옷 디테일 미쳤다. 망토 휘날리는 것도 완벽했다. 무기도 간지 났다. 근데 게임에 넣으니까 화면을 다 먹었다. 아니, 실제 크기는 1.8m 맞다. 근데 갑옷 어깨 장식이 튀어나왔다. 망토가 퍼졌다. 무기가 길었다. 시각적으로 훨씬 커 보였다. 좁은 통로 지나갈 때 벽이랑 겹쳐 보였다. 카메라 각도 바꾸면 망토가 화면 가렸다. 2명만 모여도 복잡했다."캐릭터 크기 줄여야 할 것 같은데요." "모델링 다시 해야 해요?" "...일단 스케일만 줄여보고요." 스케일 90%로 줄였다. 맵이랑 밸런스가 안 맞았다. 공격 사거리가 이상해졌다. 점프 높이가 달라 보였다. 프로토타입 단계에서는 예상 못 했다. 캡슐 콜라이더는 그냥 캡슐이니까. 모션 타이밍의 배신 공격 모션도 재작업이었다. 기획서에 썼다. "공격 속도 0.8초". 프로토타입에서 테스트했다. 타이밍 괜찮았다.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최종 모션 들어갔다. 애니메이터가 멋있게 만들었다. 칼 휘두르기 전에 준비 동작. 휘두른 후에 여운 동작. 무게감 있게. 총 시간은 0.8초 맞다. 근데 실제로 데미지 들어가는 순간은 0.4초 지점이었다. 나머지 0.4초는 준비랑 여운이었다. 유저 입장에서는 느렸다. "왜 이렇게 답답해?" 프로그래머한테 물었다. "데미지 타이밍 앞당길 수 있어요?" "그럼 모션이랑 안 맞는데요? 칼이 적한테 닿기도 전에 데미지 들어가요." "...모션 다시 받아야 하나요?" "애니메이터 스케줄이..." 결국 타협했다. 모션 속도 120%로 올렸다. 0.67초로 줄었다. 밸런스 다시 잡았다. 모든 적 공격 패턴 다시 조정했다. 프로토타입에서는 숫자만 바꾸면 됐는데. 이펙트와 가독성 이펙트 작업도 문제였다. "화려하게 해주세요." 기획 의도였다. 타격감 살려야 했다. 이펙트 아티스트가 진짜 화려하게 만들었다. 불꽃 튄다. 번개 친다. 빛난다. 폭발한다. 테스트 빌드 받았다. 1:1 전투는 괜찮았다. 이펙트 보기 좋았다. 3:3 전투는 난리였다. 화면이 온통 이펙트였다. 내 캐릭터가 어딨는지 모르겠다. 적 공격 패턴이 안 보인다. 회피 타이밍 놓쳤다. QA 리포트 올라왔다. "다수 전투 시 가독성 문제". 이펙트 톤 다운 요청했다. "좀 줄여주세요." "어느 정도요?" "...플레이해보면서 조절해야 할 것 같은데요." 일주일 동안 이펙트 강도 조절했다. 0.1씩 줄이면서 테스트했다. 최종적으로 50%까지 내렸다. 아트팀은 아쉬워했다. "이렇게 줄이면 임팩트가..." "게임이 되려면 어쩔 수 없어요." 프로토타입 단계에서는 이펙트가 없어서 몰랐다. 색감과 명도 문제 맵 라이팅도 다시 잡았다. 컨셉 아트는 분위기 좋았다. 어두운 던전, 횃불 빛, 그림자 깊게. 무드 있었다. 실제 게임에 적용했다. 너무 어두웠다. 적이 안 보였다. 바닥 함정이 안 보였다. 아이템 드랍됐는지도 모르겠다. "밝기 올려주세요." "컨셉이랑 달라지는데요?" "유저가 게임을 못 하는데요?" 명도 올렸다. 컨셉 아트 느낌 사라졌다. 아트 디렉터 안타까워했다. 근데 어쩌나. 게임이 먼저다. 적 캐릭터 색감도 문제였다. 배경이랑 비슷한 색이었다. "자연스럽게" 하려고 그렇게 했는데, 자연스러워서 안 보였다. 적 외곽선 추가했다. 아트 스타일이랑 안 맞았다. 근데 넣어야 했다. 프로토타입에서는 빨간 박스였으니까 잘 보였다. 사운드와 타이밍 사운드도 변수였다. 타격음 들어갔다. 멋있었다. 중후했다. 근데 타이밍이 안 맞았다. 칼이 적한테 닿는 순간이랑 소리 나는 순간이 0.1초 차이 났다. "사운드 타이밍 맞춰주세요." "모션이랑 이펙트 타이밍이 다 달라서..." 결국 타이밍 맞추는 데만 3일 걸렸다. 모션, 이펙트, 사운드, 데미지 판정 타이밍 다 싱크 맞췄다. 프로토타입에서는 '띠링' 소리 하나였는데. 재작업의 악순환 결국 한 달 일정이 밀렸다. 밸런스 다시 잡았다. 넉백, 모션 속도, 이펙트 타이밍 반영해서. 엑셀 시트 전부 수정했다. UI 배치 재조정했다. 가독성 우선으로. 기획서 다시 썼다. 맵 디자인 일부 수정했다. 캐릭터 크기 변경 반영해서. QA 다시 돌렸다. 버그 또 나왔다. PD한테 보고했다. "일정 지연 보고드립니다." "프로토타입 단계에서 왜 못 봤어?" "...프로토타입에서는 안 보였습니다." 변명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회색 박스로는 정말 안 보였다. 다음 프로젝트를 위한 교훈 이제 안다. 프로토타입 단계에서 최대한 실제에 가깝게 만들어야 한다. 회색 박스로만 테스트하면 안 된다. 레퍼런스 아트 일찍 받는다. 캐릭터 크기, 모션 길이, 이펙트 규모 미리 가늠한다. UI 와이어프레임만 보지 않는다. 실제 게임 화면 가독성 시뮬레이션 한다. 타격감, 템포감은 숫자만으로 기획 못 한다. 시각적, 청각적 요소 고려해야 한다. 일정 산정할 때 '아트 적용 후 재조정' 기간 넣는다. 무조건 필요하다. 근데 현실은. 프로토타입 단계에서 아트 리소스가 없다. 아트팀은 다른 프로젝트 중이다. 레퍼런스 찾아서 대충 맞춰봐야 한다. 그래도 실제랑은 다르다. 결국 아트 나오고 나면 또 놀랄 것이다. "어...?" 그게 게임 개발이다.오늘도 아트 컨펌 기다린다. 이번엔 또 뭐가 달라 보일까.
- 28 Dec, 2025
콘퍼런스 룸에서 숫자가 안 맞을 때: 누가 틀렸나
콘퍼런스 룸에서 숫자가 안 맞을 때: 누가 틀렸나 오전 10시, 회의실회의실에 들어갔다. PD, 마케팅팀, 나. "이번 패키지, 얼마나 팔릴까요?" PD가 물었다. 마케팅팀이 자료를 켰다. "월 매출 3억 예상합니다." 나는 엑셀을 열었다. 어젯밤에 시뮬 돌린 거. "플레이 타임 분석하면 2억 2천이 한계입니다." 공기가 무거워졌다. "근거가 뭔데요?" "유저 1인당 플레이 타임이 일 2시간이고, 패키지 소진까지 14일 걸립니다. 재구매 주기 고려하면..." PD가 끼어들었다. "마케팅 데이터는요?" "신규 유입 30% 증가 예상이고, 전환율 8%면..." 둘 다 맞는 것 같았다. 그런데 숫자는 안 맞았다. 숫자가 다른 이유회의가 끝났다. 내 자리로 돌아왔다. 엑셀을 다시 봤다. 내 계산은 틀리지 않았다.유저 플레이 타임: 일 평균 2시간 3분 패키지 완료까지: 13.8일 재구매율: 24% 예상 매출: 2억 2400만원PD 자료도 다시 봤다. 이것도 틀리지 않았다.신규 유입: 기존 대비 32% 증가 전환율: 8.2% 객단가: 15,000원 예상 매출: 3억 100만원문제는 이거였다. 우리가 다른 걸 보고 있었다. 나는 '기존 유저가 얼마나 살까'를 봤다. PD는 '신규 유저가 얼마나 들어올까'를 봤다. 둘 다 맞았다. 그런데 합치면 숫자가 이상했다. 누가 틀렸나 점심시간이었다. 프로그래머 민수가 물었다. "회의 어땠어?" "숫자 싸움." "누가 이겼어?" "모르겠어. 둘 다 맞는 것 같은데 합치면 틀렸어." 민수가 웃었다. "그럼 둘 다 틀린 거 아냐?" 그 말이 맞았다. 문제는 변수였다. 내가 못 본 변수, PD가 못 본 변수. 내가 못 본 거:신규 유입이 기존 유저 행동을 바꿀 수 있다 커뮤니티 분위기가 구매를 부추긴다 이벤트 타이밍이 재구매를 앞당긴다PD가 못 본 거:신규 유저는 패키지를 바로 안 산다 플레이 타임이 짧으면 재구매가 늦어진다 기존 유저 이탈이 신규 유입을 상쇄한다오후 3시, 다시 회의PD가 다시 불렀다. "숫자 다시 봤어요?" "네. 제 계산에 신규 유입 변수 넣으니까 2억 7천 나왔습니다." "저도 플레이 타임 고려하니까 2억 8천 나왔어요." 가까워졌다. 2억 7500만원으로 정리했다. "그럼 이걸로 갑시다." 회의가 끝났다. 그런데 찝찝했다. 이게 맞나? 아니면 또 다른 변수가 있나? 2주 후, 패키지 출시 런칭 당일이었다. 모니터를 켰다. 매출 대시보드를 띄웠다. 1시간마다 새로고침했다.1일차: 8200만원 2일차: 6700만원 3일차: 5100만원일주일 합계: 2억 9300만원. 우리 예상: 2억 7500만원. 틀렸다. 그런데 좋은 쪽으로 틀렸다. PD가 슬랙에 썼다. "숫자 잘 맞췄네요 ㅎㅎ" 아니었다. 우리가 못 본 변수가 또 있었다.경쟁작이 서버 터짐 스트리머가 우리 게임 방송함 커뮤니티에서 입소문 탐운이 좋았다. 숫자가 맞은 게 아니라.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퇴근길이었다. 지하철에서 생각했다. 콘퍼런스 룸에서 숫자가 안 맞을 때, 누가 틀렸나? 정답은 '둘 다 틀렸고 둘 다 맞았다'. 게임은 변수가 너무 많다.유저 행동은 예측 불가 커뮤니티는 통제 불가 경쟁 상황은 변수 시장 분위기는 랜덤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거뿐이다. 최대한 많은 데이터를 본다. 최대한 많은 변수를 고려한다. 그리고 틀릴 준비를 한다. PD도 마찬가지다. 마케팅팀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다 같이 틀린다. 그리고 다 같이 맞춘다. 다음 패키지 회의 한 달 후, 또 회의실에 들어갔다. "이번엔 얼마 예상하세요?" PD가 물었다. 나는 엑셀을 켰다. "3억 5천입니다. 근데 변수가 20개 정도 있습니다." "어떤 변수요?" 쭉 읽어줬다. 유저 이탈률, 경쟁작 스케줄, 커뮤니티 분위기, 시즌 종료 타이밍, 밸런스 패치 영향, 날씨... PD가 웃었다. "날씨요?" "비 오는 날 접속자 12% 늘어납니다. 여름이라 변수에 넣었습니다." "미쳤네요." 미친 게 아니다. 이게 게임 기획이다. 숫자는 항상 틀린다. 그래서 계속 본다. 회의가 끝났다. 자리로 돌아와서 엑셀을 다시 켰다. 변수를 하나 더 추가했다. '예상 밖의 변수: ±30%' 이게 제일 정확한 변수다. 밤 11시, 퇴근 전 모니터를 끄기 전에 슬랙을 봤다. PD가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회의 고생했어요. 근데 진짜 궁금한 게, 숫자가 안 맞을 때 스트레스 안 받아요?" 답장을 쳤다. "받죠. 근데 숫자가 딱 맞으면 더 무섭습니다. 뭔가 놓친 것 같아서요." 읽음 표시가 떴다. 답장이 왔다. "그것도 그렇네요 ㅋㅋ" 컴퓨터를 껐다. 가방을 챙겼다. 콘퍼런스 룸에서 숫자가 안 맞는 건 일상이다. 누가 틀렸나? 우리 다 틀렸다. 그래서 다음에 또 맞춰본다.숫자가 맞으면 의심하고, 틀리면 배운다.
- 27 Dec, 2025
명절에 부산 내려가서 게임 하는 죄책감
부산행 KTX 명절 전날 밤 11시. 짐 쌌다. 노트북, 충전기, 보조배터리. 옷은 대충. 게임은 철저히. KTX에서도 폰 켰다. 유저 데이터 확인. 명절 이벤트 시작 2시간 차. 참여율 62%. 나쁘지 않다. 옆자리 아저씨가 봤다. 게임하는 줄 알았을 거다. 사실 반은 맞다.집 도착 "왔냐. 밥 먹어라." 어머니가 준비한 음식. 3시간은 걸렸을 거다. 나는 30분 만에 먹었다. 그리고 폰 봤다. "게임 좀 그만해라." 일입니다, 라고 말하려다 참았다. 설명 길어진다. 그냥 미안하다고 했다. 방에 들어갔다. 노트북 켰다. 엑셀 시트 20개. 밸런스 데이터가 춤춘다. 이게 일이다. 근데 재밌다. 그게 문제다. 명절 오전 아침 9시. 일어났다. 늦게 잤다. 새벽 3시까지 유저 피드백 정리했다. "명절인데 좀 쉬지." 아버지 말씀. 맞다. 근데 게임은 명절도 모른다. 유저는 지금도 접속 중이다. 거실에서 폰 봤다. 경쟁사 신작 나왔다. 깔았다. 튜토리얼 돌렸다. 전투 시스템 괜찮네. "게임만 하네." 취미가 아닙니다. 일입니다. 또 속으로만 말했다.점심 준비 부모님이 음식 준비하신다. 나는 소파에 앉아 있다. 폰 든 채로. 도와드려야 한다. 안다. 근데 긴급 공지 올라왔다. 서버 불안정. QA팀장한테 메시지 왔다. "점심 먹고 봐도 되지 않냐." 어머니 말씀. 맞다. 근데 유저는 지금 불편하다. 우리 게임 지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5분만요. 그렇게 말하고 개발팀 단톡방 확인했다. 이미 조치 중이래. 다행이다. 그새 10분 지났다. 부모님은 거의 다 차리셨다. 나는 뭐 했나. 오후 시간 친척들 오셨다. 인사했다. 앉았다. 대화 시작됐다. "요즘 뭐해?" 게임 회사 다닙니다. 기획자요. "아, 게임 만드는 거?" 네. 맞습니다. "그럼 하루 종일 게임하네?"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설명 길어진다. 그냥 웃었다. 대화 끝났다. 다시 폰 봤다. 이벤트 매출 집계 나왔다. 목표 대비 120%. 좋다. PD한테 카톡 왔다. "수고했어요. 명절 잘 보내세요." 고맙다. 근데 나도 모니터링 중이다. 저녁 무렵 부모님이 설거지하신다. 이번엔 도왔다. 폰 안 봤다. 30분. 설거지 끝나고 방 들어갔다. 노트북 켰다. 다음 주 업데이트 기획서. 금요일까지다. 근데 명절이다. 쉬어야 한다. 알고 있다. 그래도 켰다. 일단 열어만 봤다. 한 줄 썼다. 두 줄 썼다. 시스템 구조도 그렸다. 한 시간 지났다. 문 열렸다. 어머니다. "아직도 일해?" 게임 아니라 일이라는 걸 알아주신다. 고맙다. 근데 표정은 안 좋으시다.밤 11시 거실에 나갔다. 부모님 주무신다. TV 꺼져 있다. 냉장고 열었다. 음료수 꺼냈다. 마시면서 폰 봤다. 또. 유저 게시판 확인. 칭찬 글 하나. "이번 이벤트 좋네요." 기분 좋다. 욕 글 세 개. "밸런스 좆같네." 기분 나쁘다. 근데 익숙하다. 방 돌아왔다. 침대에 누웠다. 천장 봤다. 부모님한테 제대로 얘기한 적 없다. 내가 뭐 하는지. 어떤 게임 만드는지. 얼마나 재밌는지. 아니, 얼마나 힘든지도. 그냥 "게임 회사 다녀요"로 끝났다. 그럼 "게임만 하네"로 돌아온다. 죄책감의 정체 문제는 이거다. 나도 모르겠다는 거. 폰 볼 때. 경쟁사 게임 할 때. 유저 데이터 볼 때. 기획서 쓸 때. 이게 일인가, 취미인가. 재밌어서 하는가, 해야 해서 하는가. 부모님 보기에는 똑같다. 폰 들고 화면 보는 거. 게임하는 거. 나도 헷갈린다. 지금 이거 일 때문에 보는 건가. 아니면 그냥 보고 싶어서 보는 건가. 경계가 없다. 출근해도 게임하고. 퇴근해도 게임하고. 명절에도 게임한다. 좋아하는 걸 일로 하면 행복하다고 했다. 반만 맞다. 좋아하는 걸 일로 하면 쉴 수가 없다. 다음날 아침 부산역 도착. KTX 탔다. 서울 올라간다. 어머니가 도시락 싸주셨다. 무거웠다. 맛있을 거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일 힘들지 마. 건강 챙겨."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개찰구 들어갔다. KTX 앉았다. 폰 켰다. 회사 단톡방 확인. 긴급 회의 있다. 내일 오전 10시. 도시락 열었다. 먹으면서 유저 데이터 봤다. 명절 기간 DAU 15% 증가. 맛있다. 데이터도, 도시락도. 창밖 봤다. 부산 멀어진다. 서울 가까워진다. 죄책감은 남았다. 명절 내내 부모님 앞에서 폰만 봤다. 근데 이게 내 일이다. 내 삶이다. 이해받고 싶다. 근데 설명하기 어렵다. 게임 기획자의 명절은 이렇다. 쉬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일하는 것도 아니고. 그 중간 어딘가에서 죄책감 느끼며 폰 본다. 서울역 도착했다. 집 간다. 출근 준비한다. 내일부터 다시 회사다. 밸런스 시트 펴고, 유저 피드백 보고, 기획서 쓴다. 그때는 죄책감 없다. 당당하게 게임한다. 일이니까. 근데 또 명절 온다. 추석. 그때도 똑같을 거다. 부모님 앞에서 폰 보고, 일이라고 속으로 변명하고. 이게 게임 기획자의 삶이다. 덕업일치의 그림자.명절 끝. 죄책감은 계속. 다음 업데이트 준비.
- 26 Dec, 2025
팀원끼리 '이 게임은 정말 재미있을까?'라는 의심
회의실에서 나온 질문 회의실을 나왔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거 정말 재미있나?" 3개월째 만들고 있는 게임이다. 시스템 기획서는 완성됐다. 전투 밸런스도 7번 조정했다. 코어 루프는 명확하다. 그런데 매일 테스트하는 우리는 재미를 못 느낀다. 프로그래머 민수가 먼저 물어봤다. "형, 솔직히 이거 재미있어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기획서에는 재미있다고 썼다. 근거도 있다. 경쟁작 분석도 했다. 유저 페르소나도 만들었다. 그런데 직접 플레이하면 재미가 안 느껴진다.테스트 빌드를 열었다. 튜토리얼부터 해봤다. 10분 플레이했다. 껐다. 뭔가 이상하다. 시스템은 돌아간다. 버그도 없다. 근데 재미가 없다. "우리가 너무 많이 해봐서 그런가?" 아티스트 지영이 말했다. "유저는 처음 할 텐데 괜찮을 거야." 그 말이 위로가 됐다. 1시간 정도. 저녁에 다시 플레이했다. 역시 재미없다. 3개월 동안 같은 컨텐츠만 반복했다. 밸런스 체크하려고 같은 스테이지를 500번은 깬 것 같다. 이제 눈 감고도 클리어할 수 있다. 그래서 재미가 없는 건가. 아니면 게임 자체가 재미없는 건가. 엑셀 시트가 말해주지 않는 것 숫자는 괜찮았다. 유저 1명이 하루에 접속하는 시간: 45분 예상. 첫 과금까지 걸리는 시간: 3일. 이탈률: 30% 예상. 경쟁작보다 낮다. 스프레드시트에는 다 있다. 레벨별 경험치 커브. 재화 획득량. 가챠 확률. 던전 난이도. 보상 밸런스. 모든 수치가 시뮬레이션 통과했다. 그런데 재미는 시뮬레이션할 수 없다.PD가 물어봤다. "기획 의도대로 구현됐어?" "네." "밸런스는 문제없어?" "없습니다." "그럼 됐어. 유저 반응 보면 알아." 유저 반응 보면 안다. 그 말이 제일 무섭다. 베타 테스트 전까지 3주 남았다. 3주 동안 우리는 이 게임이 재미있는지 모른 채 만든다. 나는 매일 밸런스 시트를 본다. 숫자를 조정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 숫자가 재미를 만들어줄까?" 경험치를 10% 올리면 재미있어질까. 보상을 20% 늘리면. 던전을 더 어렵게 하면. 더 쉽게 하면. 가챠 확률을 올리면. 엑셀은 대답하지 않는다. 다른 팀 이야기 복도에서 옆 팀 기획자를 만났다. 그 팀도 막바지다. "너희 게임은 재미있어?" 내가 물었다. "모르겠어. 우린 매일 해서." 같은 고민이었다. 그 팀은 작년에 게임을 출시했다. 첫 주 매출 예상: 3억. 실제 매출: 8천만원. 두 달 만에 서비스 종료했다. "개발할 때는 다들 확신했어. 재미있을 거라고." 그 말이 머릿속에 남았다. 회사 옆에 있는 편의점에 갔다. 컵라면을 끓였다. 편의점 의자에 앉아서 먹었다. 옆에서 고등학생 둘이 게임하고 있었다. 모바일 RPG다. 우리 경쟁작이다. "이거 개꿀잼이야." "인정. 밸런스 지린다." 나는 그 게임을 분석했다. 엑셀 시트에 다 정리했다. 시스템 구조도 이해한다. 밸런스 테이블도 역설계했다. 그런데 직접 플레이하면 재미가 없다. 왜냐면 나는 분석하면서 플레이하니까.고등학생들은 분석하지 않는다. 그냥 즐긴다. 숫자를 보지 않는다. 밸런스를 생각하지 않는다. 경험치 커브가 어떻든 상관없다. 재미있으면 한다. 편의점을 나왔다. 회사로 돌아갔다. 테스트 빌드를 켰다. 10분 플레이했다. 여전히 재미없다. 유저는 다를까. 베타 테스트 2주 전 팀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다들 말을 아낀다. 회의 시간이 줄었다. 각자 작업만 한다. 테스트는 안 한다. 왜냐면 테스트할 때마다 불안해지니까. 민수가 말했다. "형, 우리 게임 망하면 어떡해?" "데이터 보고 빠르게 수정하지 뭐." "근데 근본적으로 재미없으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근본적으로 재미없는 게임은 고칠 수 없다. 밸런스로 커버 안 된다. 시스템을 갈아엎어야 한다. 그럴 시간은 없다. 베타 테스트 일정은 확정됐다. 마케팅 예산도 잡혔다. 사전예약 이벤트도 기획됐다. 이제 멈출 수 없다. 불안한 채로 가는 수밖에. PD가 전체 회의를 열었다. "우리 게임 재미있습니다. 확신 가지세요. 유저 반응 좋을 겁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PD도 확신이 없어 보였다. 그날 밤 집에서 경쟁작을 했다. 3시간 플레이했다. 재미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우리 게임은 이거보다 재미있나?" 모르겠다. 베타 오픈 당일 새벽 4시에 일어났다. 잠이 안 왔다. 베타 테스트는 오전 11시 시작이다. 7시간 남았다. 회사에 일찍 갔다. 아무도 없다. 테스트 서버를 확인했다. 빌드 체크했다. 데이터 동기화 확인했다. 이상 없다. 9시에 팀원들이 출근했다. 다들 피곤해 보인다. 어제 밤 늦게까지 최종 점검했다. 이제 할 수 있는 건 없다. 11시. 서버 오픈했다. 유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실시간 모니터링 화면을 켰다. 동접자 수가 올라간다. 50명. 100명. 500명.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다들 모니터만 본다. 첫 던전 클리어율을 봤다. 85%. 예상은 80%. 괜찮다. 튜토리얼 이탈률. 12%. 예상은 15%. 좋다. 평균 플레이 타임. 35분. 예상은 45분. 좀 짧다. 숫자는 괜찮다. 그런데 재미는. 민수가 유저 채팅을 띄웠다. 커뮤니티 반응을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그래픽 괜찮은데?" "시스템은 좀 복잡하네." "이거 뭐하는 게임이야?" "재미는 있는데 뭔가 아쉬워." 재미는 있는데 뭔가 아쉽다. 그 코멘트가 제일 무서웠다. 베타 테스트 3일차 데이터가 쌓였다. 숫자는 예상보다 좋았다. 평균 플레이 타임: 42분. 재접속률: 68%. 첫 과금 전환율: 4.2%. 경쟁작보다 높다. 그런데 유저 반응은 애매했다. "잘 만들긴 했는데 뭔가 빠진 느낌." "시스템은 탄탄한데 재미는 보통." "할 만은 한데 계속 할지는 모르겠음." 지영이 물었다. "이거 긍정이야 부정이야?" "애매한 거지." "그럼 망한 거야?" "아니 그 정도는 아니고." 망한 건 아니다. 그런데 대박도 아니다. 그냥 그런 게임. 숫자는 괜찮은데 뭔가 부족한 게임. PD가 말했다. "출시 전에 재미 더 끌어올립시다." 어떻게? "밸런스 조정하고, 컨텐츠 추가하고." 그게 재미를 만들까? 나는 밸런스 시트를 열었다. 어디를 만져야 할까. 경험치? 보상? 난이도? 스킬? 가챠? 숫자를 바꾸면 재미가 생길까. 피드백을 뜯어보는 시간 베타 테스터 인터뷰를 했다. 10명. 각자 30분씩. 게임에 대해 물어봤다. "재미있었어요?" "응 그냥 그런 거 같은데." "어떤 부분이 아쉬웠어요?" "음... 뭐랄까, 다 괜찮은데 확 끌리지는 않아요." 확 끌리지 않는다. 다른 테스터에게도 물었다. "이 게임 친구한테 추천할 거예요?" "글쎄요. 할 만하긴 한데 꼭 추천할 정도는." "왜요?" "그냥요. 특별한 게 없어요." 특별한 게 없다. 인터뷰를 정리했다. 공통 피드백:시스템은 잘 만들어짐 그래픽 괜찮음 밸런스 무난함 그런데 특별하지 않음 기억에 남는 순간이 없음 다시 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듦우리는 잘 만들었다. 그런데 특별하지 않다. 기획서를 다시 봤다. 코어 컨셉: 전략적 덱 빌딩 RPG. 타겟: 20-30대 남성. 레퍼런스: A게임 + B게임. 차별점: C 시스템. 차별점이 약했다. 레퍼런스 게임들의 조합일 뿐이다. 새로운 경험은 없다. 우리는 안전하게 만들었다. 검증된 시스템. 검증된 밸런스. 검증된 재미. 그래서 망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뜨지도 않는다. 민수가 물었다. "형, 이거 어떻게 고쳐?" "모르겠어." "정말?" "응. 근본을 바꿔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 출시는 2개월 뒤다. 불안을 견디는 방법 결국 우리는 출시하기로 했다. 베타 피드백 반영해서. 밸런스 조정하고. 컨텐츠 추가하고. UI 개선하고. 근본은 안 바뀐다. 특별해지지 않는다. 그냥 괜찮은 게임으로 출시한다. 그게 현실이다. 회사 옥상에 올라갔다. 담배 피우는 곳이다. 나는 안 피우지만 가끔 올라온다. 민수가 와 있었다. "형도 왔네." "응." 한강이 보였다. 늦은 밤이라 조용하다. 민수가 말했다. "우리 게임 망하면 어떡하지." "망하진 않을 거야." "대박도 아니잖아." "응." 침묵이 흘렀다. "형, 게임 기획 계속할 거야?" "모르겠어. 너는?" "나도 모르겠어." 우리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래도 만들긴 하잖아." 민수가 말했다. "응." "재미있는지 모르는 게임을." "그래도 만들어." 그게 답이다. 재미있는지 확신할 수 없어도 만든다. 불안한 채로 만든다. 출시한다. 유저 반응 본다. 데이터 분석한다. 업데이트한다. 그리고 다음 게임을 만든다. 또 불안한 채로. 옥상을 내려왔다. 자리로 돌아왔다. 밸런스 시트를 열었다. 경험치 커브를 수정했다. 던전 보상을 조정했다. 스킬 데미지를 올렸다. 이게 재미를 만들까. 모르겠다. 그래도 한다. 출시 한 달 전 팀 분위기가 조금 나아졌다. 베타 데이터가 나쁘지 않아서. 망하지는 않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대박은 아니어도 괜찮다. 흥행은 아니어도 괜찮다. 서비스는 유지된다. 다음 업데이트를 준비한다. 그게 우리 일이다. PD가 회의에서 말했다. "출시 후 3개월 로드맵 짭시다. 유저 이탈 막으려면 신규 컨텐츠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미 다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출시도 안 했는데. 집에 가는 길. 지하철에서 게임했다. 우리 베타 빌드가 아니라 다른 게임. 신작 RPG다. 평점 4.5. 다운로드 50만. 30분 플레이했다. 재미있었다. 시스템은 단순하다. 밸런스는 평범하다. 그래픽도 특별하지 않다. 그런데 뭔가 있다. 확 끄는 순간이 있다. 다시 하고 싶게 만드는 재미가 있다. 이게 뭐지. 우리 게임과 뭐가 다르지. 숫자로 설명할 수 없다. 기획서에 쓸 수 없다. 엑셀 시트에 넣을 수 없다. 그냥 재미다. 그래도 만든다 오늘도 출근했다. 오늘도 밸런스 시트를 연다. 오늘도 숫자를 만진다. 출시까지 4주 남았다. 우리 게임이 재미있을까. 여전히 모르겠다. 유저가 좋아할까. 확신 없다. 대박 칠까. 아니. 그래도 만든다. 출시한다. 데이터 본다. 업데이트한다. 이게 게임 기획자의 일이다. 불안을 견디는 게 일이다. 확신 없이 만드는 게 일이다. 재미는 출시 후에 알게 된다. 유저 반응으로. 숫자로. 리뷰로. 매출로. 그 전까지는 모른다. 그냥 믿는다. 우리가 잘 만들었다고. 괜찮을 거라고. 밸런스 시트를 저장했다. 슬랙에 업데이트를 공유했다. 민수가 확인 이모지를 달았다. 오늘도 하루가 지나간다. 출시는 가까워진다. 불안도 커진다. 그래도 만든다.재미는 숫자가 아니라 순간이다. 그 순간은 출시 후에야 알게 된다.
- 25 Dec, 2025
좋아하던 게임을 일로 분석하면: 마법이 풀린다
그 게임이 일이 되던 날어제 집에서 그 게임을 켰다. 10년 전 고등학생 때 미친 듯이 했던 RPG. 500시간 넘게 했던 것 같다. 추억 보정으로 다시 해볼까 싶었다. 캐릭터 선택 화면에서 손이 멈췄다. "이 캐릭터 초반 DPS가 낮아서 레벨링 구간이 지루한데." 로딩 화면이 뜨자마자 생각했다. "로딩 시간 8초. 요즘 기준으론 길다. 유저 이탈 포인트." 첫 마을에 도착했다. 예쁜 배경음악이 나온다. "이 음악 루프 타이밍 좋네. 48초 구간. BGM 기획 잘했다." 게임을 하는 게 아니었다. 분석하고 있었다. 끄고 나왔다. 30분도 못 했다.밸런스 시트로 보이는 세상이 병은 입사 2년 차부터 시작됐다. 게임을 켜면 숫자가 보인다. 재미가 아니라 수치가. RPG 하다가 몬스터 잡으면:경험치 120 / 내 레벨 15 = 8% 경험치 효율 나쁨 사냥터 밸런스 이상함액션 게임 하다가 보스전:패턴 3개 / 체력 3구간 패턴 변화 예측 가능 난이도 설계 평이함모바일 게임 접속하면:데일리 미션 7개 보상 받기까지 클릭 22번 UX 비효율적친구가 물었다. "왜 게임 안 하냐?" 대답 못 했다. "재밌게 못 하겠어"라고 하면 이상한 놈 된다. 진짜 이유는 다르다. 게임이 게임으로 안 보인다. 엑셀 시트로 보인다. 기획서로 보인다. 누군가의 노동으로 보인다. 마법이 풀렸다.존경하던 게임, 분해되던 순간작년에 회사에서 벤치마킹 과제를 받았다. 주제는 내가 중학생 때부터 했던 그 게임. 업계에서 레전드 취급받는 작품. 2주 동안 그 게임을 뜯었다.전투 시스템 분석 레벨 구간별 경험치 곡선 보상 스케줄 역설계 유저 동선 최적화 포인트 가챠 확률 추정보고서 30페이지 썼다. 팀장이 칭찬했다. 집에 와서 멍했다. 그 게임을 다신 못 할 것 같았다. 고등학생 때 밤새워 레이드 돌던 그 던전. 이제 알아버렸다. 보스 패턴이 3단계로 설계됐고, 체력 70%/40%에서 페이즈 전환되고, 광역기 타이밍이 12초 주기라는 걸. 모르고 싶었다. 게임이 얼마나 정교한 수학인지. 재미가 얼마나 계산된 결과물인지. 마법 같던 순간들이 전부 누군가의 엑셀 함수였다는 걸. 존경은 남았다. 하지만 동시에 즐거움은 사라졌다."이거 왜 이렇게 만들었지?" 퇴근 후 게임 커뮤니티 들어가면 유저들이 싸운다. "이 캐릭터 너무 약함. 기획자 뭐함?" "밸런스 똥망. 돈만 밝히네." 예전엔 나도 그랬다. 같이 욕했다. 지금은 다르다. 댓글 보면 자동으로 변역된다. "기획자 뭐함?" → "이 수치 결정한 사람의 의도가 궁금한데?" "밸런스 똥망" → "밸런스 패치 주기와 데이터 수집 기간의 한계" "돈만 밝히네" → "수익 지표 때문에 기획 의도가 변경됐구나" 유저 댓글 보면 답답하다. 설명하고 싶다. "아니 이건 말이야, 개발 일정이 2주밖에 안 남아서..." 하지만 말 안 한다. 변명처럼 들린다. 그냥 넘긴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도 5년 전엔 저랬지."재미의 정체를 알아버린 사람 친구가 신작 게임 추천했다. "이거 개재밌어. 너도 해봐." 3시간 했다. 재밌었다. 근데 동시에 다 보였다.튜토리얼 8분. 적절함. 첫 보상까지 4분. 도파민 타이밍 좋음. 가챠 연출 3초. 기대감 증폭 잘함. 과금 유도 레벨 15. 전형적인 설계.친구가 물었다. "어때? 재밌지?" "응. 재밌어." 거짓말은 아니다. 재밌긴 했다. 하지만 재미의 50%는 "기획 잘했네"였다. 나머지 50%만 순수한 즐거움이었다. 예전엔 100%였는데. 마술 쇼를 보는데 트릭이 다 보이는 기분. 마술은 여전히 멋지다. 하지만 마법은 아니다.회사에서 만드는 게임도 마찬가지 역설적이게도 내가 만드는 게임은 즐길 수 있다. 우리 게임 베타 테스트할 때. 내가 설계한 전투 시스템. 6개월 밤새워 만든 밸런스. 유저들이 즐긴다. 커뮤니티에 공략이 올라온다. 팬아트가 나온다. 그때는 신기하다. 내가 만든 수치들이 누군가에겐 마법이 된다. 하지만 나는 못 즐긴다. 내 엑셀 시트를 보고 있는 것뿐이다. 동료 프로그래머가 물었다. "우리 게임 안 해봐?" "QA는 했지." "아니 그게 아니라 진짜로 즐기면서." "..." 못 한다. 내 게임이 제일 못 한다. 코드 보이고, 기획서 보이고, 회의 내용 보이고, 타협한 부분 보이고, 못 넣은 기능 보이고, 아쉬운 밸런스 보인다. 마법사는 자기 마법에 안 걸린다.그래도 게임을 한다 요즘 인디 게임을 한다. 큰 회사 게임은 못 하겠다. 다 보여서. 인디는 조금 다르다. 조악하다. 밸런스 엉망이다. UI도 불편하다. 근데 그게 좋다. 완벽한 기획이 없다. 최적화된 수치가 없다. 그냥 만들고 싶은 걸 만든 흔적이 보인다. 어제 한 인디 게임. 전투 밸런스가 이상했다. 중반 난이도가 갑자기 튄다. 예전 같으면 "밸런스 설계 미스네"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지금은 다르게 본다. "1인 개발자가 끝까지 테스트 못 했구나." 짜증 안 난다. 오히려 응원하게 된다. 이 게임 만든 사람도 나처럼 게임 좋아해서 만들었을 것이다. 밤새워 코딩했을 것이다. 혼자 밸런스 잡느라 고생했을 것이다. 동료가 보인다. 경쟁자가 아니라.일과 사랑은 분리해야 한다던데 친구가 말했다. "좋아하는 걸 직업으로 삼으면 행복하대." 반은 맞다. 좋아하는 걸 일로 하니까 출근이 덜 괴롭다. 게임 기획 자체는 재밌다. 밸런스 맞을 때 쾌감 있다. 유저가 좋아하면 뿌듯하다. 하지만 반은 틀렸다. 좋아하던 게임을 잃어버렸다. 순수하게 즐기던 그 감정을 돌려받을 수 없다. 취미가 직업이 되면 취미가 사라진다. 새로운 취미를 찾아야 한다. 나는 아직 못 찾았다. 퇴근하고 뭐 하지? 게임? 그건 일이다. 영화? 스토리 구조 분석한다. 웹툰? 캐릭터 설계 뜯어본다. 직업병이다. 고칠 수 없다.마법이 풀린 세계에서 가끔 생각한다. 후회하냐고. 게임 기획자 안 했으면 아직도 게임을 마법처럼 즐겼을까? 모르겠다. 확실한 건, 돌아갈 수 없다는 것. 마법이 풀린 세계는 덜 신비롭다. 하지만 더 명확하다. 재미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안다. 왜 이 게임이 명작인지 이해한다. 어떤 게임이 왜 망했는지 알 수 있다. 순수한 즐거움은 잃었다. 대신 깊은 이해를 얻었다. 그게 나쁜 거래는 아니다. 다른 거래일 뿐. 어제 신입이 물었다. "선배님은 왜 게임 기획 하세요?" 잠깐 생각했다. "게임 자체는 못 즐겨도, 게임 만드는 건 여전히 재밌어서." 진심이었다.여전히 게임을 사랑한다 좋아하던 게임을 다시 즐길 수는 없다. 하지만 게임 자체를 싫어하게 된 건 아니다. 사랑하는 방식이 바뀐 것뿐이다. 플레이어에서 창작자로. 마법 보는 사람에서 마법 만드는 사람으로. 어제 우리 게임 유저 커뮤니티 봤다. 누가 공략글 올렸다. "이 보스 패턴 분석했습니다." 댓글 달렸다. "와 이거 알고 나니까 쉽네요. 감사합니다!" 미소 지었다. 내가 설계한 패턴이다. 12초 주기로 광역기 나가고, 체력 40%에서 페이즈 바뀌는. 그 유저는 모를 것이다. 그 패턴 만드는 데 3주 걸렸다는 걸. 7번 수정했다는 걸. QA에서 난이도 조정 8번 했다는 걸. 몰라도 된다. 그 유저에게 그건 여전히 마법이니까. 내가 만든 마법. 그걸로 충분하다.마법이 풀려도 괜찮다. 이제 내가 마법을 만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