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던 게임을 일로 분석하면: 마법이 풀린다
- 25 Dec, 2025
그 게임이 일이 되던 날

어제 집에서 그 게임을 켰다. 10년 전 고등학생 때 미친 듯이 했던 RPG. 500시간 넘게 했던 것 같다. 추억 보정으로 다시 해볼까 싶었다.
캐릭터 선택 화면에서 손이 멈췄다.
“이 캐릭터 초반 DPS가 낮아서 레벨링 구간이 지루한데.”
로딩 화면이 뜨자마자 생각했다.
“로딩 시간 8초. 요즘 기준으론 길다. 유저 이탈 포인트.”
첫 마을에 도착했다. 예쁜 배경음악이 나온다.
“이 음악 루프 타이밍 좋네. 48초 구간. BGM 기획 잘했다.”
게임을 하는 게 아니었다. 분석하고 있었다.
끄고 나왔다. 30분도 못 했다.
밸런스 시트로 보이는 세상

이 병은 입사 2년 차부터 시작됐다.
게임을 켜면 숫자가 보인다. 재미가 아니라 수치가.
RPG 하다가 몬스터 잡으면:
- 경험치 120 / 내 레벨 15 = 8%
- 경험치 효율 나쁨
- 사냥터 밸런스 이상함
액션 게임 하다가 보스전:
- 패턴 3개 / 체력 3구간
- 패턴 변화 예측 가능
- 난이도 설계 평이함
모바일 게임 접속하면:
- 데일리 미션 7개
- 보상 받기까지 클릭 22번
- UX 비효율적
친구가 물었다. “왜 게임 안 하냐?”
대답 못 했다. “재밌게 못 하겠어”라고 하면 이상한 놈 된다.
진짜 이유는 다르다. 게임이 게임으로 안 보인다. 엑셀 시트로 보인다. 기획서로 보인다. 누군가의 노동으로 보인다.
마법이 풀렸다.
존경하던 게임, 분해되던 순간

작년에 회사에서 벤치마킹 과제를 받았다. 주제는 내가 중학생 때부터 했던 그 게임. 업계에서 레전드 취급받는 작품.
2주 동안 그 게임을 뜯었다.
- 전투 시스템 분석
- 레벨 구간별 경험치 곡선
- 보상 스케줄 역설계
- 유저 동선 최적화 포인트
- 가챠 확률 추정
보고서 30페이지 썼다. 팀장이 칭찬했다.
집에 와서 멍했다.
그 게임을 다신 못 할 것 같았다.
고등학생 때 밤새워 레이드 돌던 그 던전. 이제 알아버렸다. 보스 패턴이 3단계로 설계됐고, 체력 70%/40%에서 페이즈 전환되고, 광역기 타이밍이 12초 주기라는 걸.
모르고 싶었다.
게임이 얼마나 정교한 수학인지. 재미가 얼마나 계산된 결과물인지. 마법 같던 순간들이 전부 누군가의 엑셀 함수였다는 걸.
존경은 남았다. 하지만 동시에 즐거움은 사라졌다.
”이거 왜 이렇게 만들었지?”
퇴근 후 게임 커뮤니티 들어가면 유저들이 싸운다.
“이 캐릭터 너무 약함. 기획자 뭐함?”
“밸런스 똥망. 돈만 밝히네.”
예전엔 나도 그랬다. 같이 욕했다.
지금은 다르다. 댓글 보면 자동으로 변역된다.
“기획자 뭐함?” → “이 수치 결정한 사람의 의도가 궁금한데?”
“밸런스 똥망” → “밸런스 패치 주기와 데이터 수집 기간의 한계”
“돈만 밝히네” → “수익 지표 때문에 기획 의도가 변경됐구나”
유저 댓글 보면 답답하다. 설명하고 싶다. “아니 이건 말이야, 개발 일정이 2주밖에 안 남아서…”
하지만 말 안 한다. 변명처럼 들린다.
그냥 넘긴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도 5년 전엔 저랬지.”
재미의 정체를 알아버린 사람
친구가 신작 게임 추천했다. “이거 개재밌어. 너도 해봐.”
3시간 했다.
재밌었다. 근데 동시에 다 보였다.
- 튜토리얼 8분. 적절함.
- 첫 보상까지 4분. 도파민 타이밍 좋음.
- 가챠 연출 3초. 기대감 증폭 잘함.
- 과금 유도 레벨 15. 전형적인 설계.
친구가 물었다. “어때? 재밌지?”
“응. 재밌어.”
거짓말은 아니다. 재밌긴 했다.
하지만 재미의 50%는 “기획 잘했네”였다. 나머지 50%만 순수한 즐거움이었다.
예전엔 100%였는데.
마술 쇼를 보는데 트릭이 다 보이는 기분. 마술은 여전히 멋지다. 하지만 마법은 아니다.
회사에서 만드는 게임도 마찬가지
역설적이게도 내가 만드는 게임은 즐길 수 있다.
우리 게임 베타 테스트할 때. 내가 설계한 전투 시스템. 6개월 밤새워 만든 밸런스.
유저들이 즐긴다. 커뮤니티에 공략이 올라온다. 팬아트가 나온다.
그때는 신기하다. 내가 만든 수치들이 누군가에겐 마법이 된다.
하지만 나는 못 즐긴다.
내 엑셀 시트를 보고 있는 것뿐이다.
동료 프로그래머가 물었다. “우리 게임 안 해봐?”
“QA는 했지.”
“아니 그게 아니라 진짜로 즐기면서.”
”…”
못 한다. 내 게임이 제일 못 한다.
코드 보이고, 기획서 보이고, 회의 내용 보이고, 타협한 부분 보이고, 못 넣은 기능 보이고, 아쉬운 밸런스 보인다.
마법사는 자기 마법에 안 걸린다.
그래도 게임을 한다
요즘 인디 게임을 한다.
큰 회사 게임은 못 하겠다. 다 보여서.
인디는 조금 다르다. 조악하다. 밸런스 엉망이다. UI도 불편하다.
근데 그게 좋다.
완벽한 기획이 없다. 최적화된 수치가 없다. 그냥 만들고 싶은 걸 만든 흔적이 보인다.
어제 한 인디 게임. 전투 밸런스가 이상했다. 중반 난이도가 갑자기 튄다.
예전 같으면 “밸런스 설계 미스네”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지금은 다르게 본다. “1인 개발자가 끝까지 테스트 못 했구나.”
짜증 안 난다. 오히려 응원하게 된다.
이 게임 만든 사람도 나처럼 게임 좋아해서 만들었을 것이다. 밤새워 코딩했을 것이다. 혼자 밸런스 잡느라 고생했을 것이다.
동료가 보인다. 경쟁자가 아니라.
일과 사랑은 분리해야 한다던데
친구가 말했다. “좋아하는 걸 직업으로 삼으면 행복하대.”
반은 맞다.
좋아하는 걸 일로 하니까 출근이 덜 괴롭다. 게임 기획 자체는 재밌다. 밸런스 맞을 때 쾌감 있다. 유저가 좋아하면 뿌듯하다.
하지만 반은 틀렸다.
좋아하던 게임을 잃어버렸다. 순수하게 즐기던 그 감정을 돌려받을 수 없다.
취미가 직업이 되면 취미가 사라진다. 새로운 취미를 찾아야 한다.
나는 아직 못 찾았다.
퇴근하고 뭐 하지? 게임? 그건 일이다. 영화? 스토리 구조 분석한다. 웹툰? 캐릭터 설계 뜯어본다.
직업병이다. 고칠 수 없다.
마법이 풀린 세계에서
가끔 생각한다. 후회하냐고.
게임 기획자 안 했으면 아직도 게임을 마법처럼 즐겼을까?
모르겠다.
확실한 건, 돌아갈 수 없다는 것.
마법이 풀린 세계는 덜 신비롭다. 하지만 더 명확하다. 재미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안다. 왜 이 게임이 명작인지 이해한다. 어떤 게임이 왜 망했는지 알 수 있다.
순수한 즐거움은 잃었다. 대신 깊은 이해를 얻었다.
그게 나쁜 거래는 아니다. 다른 거래일 뿐.
어제 신입이 물었다. “선배님은 왜 게임 기획 하세요?”
잠깐 생각했다.
“게임 자체는 못 즐겨도, 게임 만드는 건 여전히 재밌어서.”
진심이었다.
여전히 게임을 사랑한다
좋아하던 게임을 다시 즐길 수는 없다.
하지만 게임 자체를 싫어하게 된 건 아니다.
사랑하는 방식이 바뀐 것뿐이다.
플레이어에서 창작자로. 마법 보는 사람에서 마법 만드는 사람으로.
어제 우리 게임 유저 커뮤니티 봤다. 누가 공략글 올렸다. “이 보스 패턴 분석했습니다.”
댓글 달렸다. “와 이거 알고 나니까 쉽네요. 감사합니다!”
미소 지었다.
내가 설계한 패턴이다. 12초 주기로 광역기 나가고, 체력 40%에서 페이즈 바뀌는.
그 유저는 모를 것이다. 그 패턴 만드는 데 3주 걸렸다는 걸. 7번 수정했다는 걸. QA에서 난이도 조정 8번 했다는 걸.
몰라도 된다.
그 유저에게 그건 여전히 마법이니까.
내가 만든 마법.
그걸로 충분하다.
마법이 풀려도 괜찮다. 이제 내가 마법을 만드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