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목이 울고 있습니다: 게임 기획자의 직업병

손목이 울고 있습니다: 게임 기획자의 직업병

손목이 울고 있습니다: 게임 기획자의 직업병 오늘도 손목은 비명을 지른다 아침 10시. 출근해서 마우스 잡는다. 손목이 쑤신다. 어제도 밤 10시까지 잡았던 그 마우스. 밤새 식지도 않았을 것 같다. 엑셀을 켠다. 밸런스 시트가 열린다. 숫자가 3000개쯤 된다. 하나하나 클릭해서 조정한다. 클릭, 드래그, 복사, 붙여넣기. 이게 내 일이다. 손목은 정직하다. 딱 2시간 지나면 신호를 보낸다. '이제 그만 좀 하자.' 무시한다. 일이 끝나야 쉴 수 있다. 일은 끝나지 않는다.오른손이 특히 심하다. 마우스 잡는 손. 5년간 쉬지 않고 일한 손. 손목터널증후군이라고 한다. 의사가 말했다. "직업을 바꾸시거나, 습관을 바꾸시거나." 직업을 바꿀 수 없다. 습관을 바꿀 수도 없다. 기획은 마우스로 하는 거다. 보호대를 샀다. 검은색 손목 보호대. 게임 기획자 10명 중 7명이 찬다. 우리의 훈장이다. 우리의 치욕이다. 의자가 내 몸을 기억한다 하루 10시간. 의자에 앉아있는 시간이다. 점심시간 빼면 9시간. 화장실 가는 시간 빼면 8시간 반. 그래도 10시간이 맞는 것 같다. 엉덩이가 의자 모양이 됐다. 허리는 C자다. 거북목은 기본이다. 어깨는 항상 굳어있다. 작년에 좋은 의자를 샀다. 80만원짜리. 회사가 50만원 지원해줬다. "직원 건강이 중요하니까요." 고맙다. 정말로. 의자는 좋다. 허리를 받쳐준다. 팔걸이 높이를 조절할 수 있다. 목 받침도 있다. 그래도 아프다. 10시간을 앉아있으면 어떤 의자든 소용없다.점심 먹고 졸음이 온다. 커피를 마신다. 다시 앉는다. 오후 3시쯤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한다. 30초. 다시 앉는다. 동료가 말한다. "형, 요즘 자세 더 구부정해진 것 같은데요?" 알고 있다. 거울 보면 알 수 있다. 모르는 척한다. "그래? 피곤해서 그런가." 정형외과에서 말했다. "허리 디스크 초기예요. 지금부터 관리 안 하면 30대 중반엔 위험합니다." 나는 지금 30살이다. 물리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일주일에 3번. 퇴근하고 가라고 했다. 퇴근이 8시다. 병원은 7시에 문 닫는다. 운동을 해야 한다는 건 안다 헬스장 등록했다. 3개월 끊었다. 20만원. 3번 갔다. 한 번에 6만 6천원 꼴이다. 비싼 샤워였다. 아침에 가려고 했다. 7시에 일어나야 한다. 못 일어났다. 어제 밤 12시에 잤다. 7시간도 못 잤다. 퇴근하고 가려고 했다. 8시 퇴근. 9시까지 갈 수 있다. 못 갔다. 야근이었다. 런칭 2주 전이다. 주말에 가려고 했다. 토요일 오전이면 된다. 못 갔다. 금요일 밤에 긴급 패치가 터졌다. 토요일 오후 2시에 일어났다. 몸이 안 움직였다.3개월이 지났다. 재등록 문자가 왔다. "회원님, 운동 효과 느끼셨죠? 재등록 하시면 10% 할인!" 안 느꼈다. 3번 갔다. 요가를 해볼까 생각했다. 유튜브 영상을 틀었다. "하루 10분이면 됩니다." 10분도 없다. 퇴근하면 9시다. 저녁 먹으면 10시다. 씻으면 11시다. 내일 밸런스 시트 봐야 한다. 걷기라도 하려고 했다. 출퇴근길에. 회사까지 2.5km. 걸으면 30분. 버스 타면 15분. 15분이 아깝다. 그 15분에 잠을 더 잔다. 동료 하나는 새벽 러닝을 한다. 5시 반에 일어나서 5km 뛴다. "형도 해봐요. 개운해요." 대단하다. 나는 못 한다. 런칭 끝나고 해볼까. 런칭은 3개월에 한 번씩 온다. 스트레칭 영상은 즐겨찾기에만 있다 유튜브 즐겨찾기에 영상이 12개 있다. 전부 스트레칭 영상이다. '거북목 해결', '손목터널증후군 완화', '허리디스크 예방'. 하나도 안 본다. 저장만 한다. '나중에 봐야지.' 나중은 오지 않는다. 저장한 게 6개월 전이다. 가끔 본다. 런칭 직후. 몸이 완전히 망가졌을 때. 영상을 틀고 따라한다. 5분. "아, 시원하다." 다음 날도 하려고 한다. 안 한다. 책상 옆에 폼롤러가 있다. 1년 전에 샀다. 쓴 횟수 10번 정도. 지금은 가방 거치대다. 회사에서 스트레칭 교육을 했다. 강사가 왔다. "여러분, 한 시간마다 일어나서 스트레칭 하세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안 한다. 점심시간에 산책하라고 했다. 회사 뒤에 공원이 있다. 10분이면 한 바퀴 돌 수 있다. 가본 적 없다. 점심 먹고 카페 가서 커피 마신다. 다시 일한다. 통증은 익숙해진다 아침에 일어나면 손목이 뻣뻣하다. 주먹을 쥐었다 펴는 데 30초 걸린다. 손가락이 굳어있다. 처음엔 무서웠다. '이거 큰일 나는 거 아닌가.' 병원 갔다. 약 받았다. 먹었다. 나았다. 다시 아팠다. 이제는 익숙하다. '오늘도 아프네.' 그냥 움직인다. 마우스를 잡는다. 일을 한다. 통증은 배경음악이 됐다. 허리도 그렇다. 오후 3시쯤 되면 쑤신다. '아, 또 이 시간이구나.' 자세를 바꾼다. 5분 버틴다. 다시 구부정해진다. 목도 그렇다. 고개를 돌리면 뚝뚝 소리가 난다. 20대 중반부터 났다. 이제 30살인데 소리가 더 커졌다. 동료들과 통증 자랑을 한다. "나 어제 손목 너무 아파서 마우스 왼손으로 잡았어." "나는 허리 때문에 서서 일했어." "나는 목 안 돌아가서 모니터를 옆으로 옮겼어." 웃으면서 한다. 웃기는 얘기가 아닌데 웃는다. 안 웃으면 슬프다. 진통제는 서랍에 항상 있다 책상 서랍을 연다. 진통제가 4통 있다. 타이레놀, 게보린, 이브, 펜잘.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 오늘은 손목이 아프다. 타이레놀을 먹는다. 30분 뒤 덜 아프다. 일을 계속한다. 내일은 허리가 아프다. 게보린을 먹는다. 1시간 뒤 덜 아프다. 일을 계속한다. 모레는 목이 아프다. 이브를 먹는다. 효과가 약하다. 펜잔을 추가로 먹는다. 일을 계속한다. 의사가 말했다. "진통제는 증상만 가리는 거예요. 근본적인 치료가 필요해요." 알고 있다. 치료할 시간이 없다. 약사가 말했다. "이거 자주 드시면 위에 안 좋아요." 알고 있다. 위도 이미 안 좋다. 야근하면서 커피 너무 많이 마셨다. 한 달에 진통제 40알 먹는다. 하루 평균 1.3알. 괜찮은 건가. 아닌 것 같다. 어쩔 수 없다. 30대가 두렵다 지금 30살이다. 5년 뒤면 35살이다. 이 상태로 5년 더 버틸 수 있을까. 선배가 있었다. 38살. 게임 기획 15년차. 손목 수술했다. 3개월 쉬었다. 복귀했다. 1년 뒤 퇴사했다. "더는 못 하겠더라." 다른 선배도 있었다. 40살. 허리디스크 수술했다. 6개월 쉬었다. 복귀 안 했다. 지금 프리랜서 컨설턴트 한다. 또 다른 선배는 35살에 목디스크 왔다. 지금도 일한다. 목에 보조기 차고. "돈 벌어야지 뭐." 슬프다. 내 미래가 보인다. 35살에 수술. 40살에 재수술. 45살에 은퇴. 아니면 평생 통증 안고 살기. 게임 기획이 좋다. 정말 좋다. 내가 만든 밸런스로 유저가 재밌어하면 뿌듯하다. 하지만 몸이 망가진다. 확실히 망가진다. 변명은 많다 "런칭 끝나면 운동할 거야." 런칭은 3개월마다 온다. 끝나고 나면 다음 런칭 준비다. "이번 프로젝트만 끝내면 쉴 거야." 프로젝트는 끝나지 않는다. 끝나면 새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연차 써서 병원 갈 거야." 연차는 썼다. 집에서 잤다. 병원은 안 갔다. "주말에 꼭 스트레칭 할 거야." 주말엔 피곤하다. 평일에 쌓인 피로를 푼다. 스트레칭은 다음 주말로. "다음 달부터 헬스장 다닐 거야." 다음 달이 왔다. 또 다음 달로 미룬다. 변명이 습관이 됐다. 나 자신한테 거짓말하는 게 익숙하다. 이러면 안 되는 거 안다. 바꾸는 게 어렵다. 회사는 신경 쓴다 (조금만) 회사가 간식을 준다. 과일, 빵, 요거트. 고맙다. 건강에 좋다. 손목은 안 나아진다. 회사가 안마의자를 뒀다. 3층 휴게실에. 점심시간에 쓸 수 있다. 줄이 길다. 5명 대기. 10분씩 쓴다. 내 차례 올 때까지 30분. 점심시간은 1시간. 밥 먹을 시간 없다. 회사가 스탠딩 책상을 줬다. 신청하면 바꿔준다. 3명 신청했다. 2명은 다시 일반 책상으로 바꿨다. "서 있으니까 다리 아파요." 회사가 재택근무를 준다. 주 1회. 화요일이나 목요일. 집에서 일한다. 더 오래 일한다. 출퇴근 시간만큼 더 일한다. 몸은 더 안 좋아진다. 회사는 노력한다. 인정한다.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일의 양을 줄이는 게 답이다. 그건 안 된다. 회사는 성장해야 한다. 동료들도 다 아프다 팀 회식 자리. 술 마시면서 하는 얘기. "형, 손목 어때요?" "망했지 뭐." 5명 중 4명이 손목 보호대 찬다. 나머지 1명은 신입이다. 1년 뒤면 찰 거다. 프로그래머들도 똑같다. 아티스트들도 똑같다. QA팀도 똑같다. 게임 회사는 다 아프다. "우리 이러다 다 같이 망가지는 거 아니야?" 누군가 웃으면서 말한다. 다들 웃는다. 맞는 말이라 웃는다. 정형외과 추천 리스트가 있다. 사내 위키에. 손목, 허리, 목 파트별로 정리돼 있다. 병원 이름, 의사 이름, 대기 시간까지. 슬픈 위키다. "○○병원 괜찮았어요?" "거기 좋아요. 근데 예약 2주 걸려요." "그럼 급할 땐 어디 가요?" "응급실요." 이게 정상이 아닌 건 안다. 하지만 이게 우리 일상이다. 그래도 못 멈춘다 손목이 아프다. 허리가 아프다. 목이 아프다. 그래도 출근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한다. '오늘은 일찍 퇴근해야지.' 저녁 9시에 퇴근한다. 내일은 꼭 스트레칭하겠다고 다짐한다. 내일도 안 한다. 이번 주말엔 운동하겠다고 약속한다. 주말에 집에서 잔다. 왜 못 멈출까. 일이 좋아서? 반은 맞다. 습관이라서? 반은 맞다. 두려워서일 수도 있다. 멈추면 뒤처질 것 같다. 쉬면 대체될 것 같다. 그래서 쉬지 못한다. 30살에 이미 몸이 망가졌다. 40살엔 어떻게 될까. 50살까지 일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해답은 없다 이 글을 쓰면서도 손목이 아프다. 키보드 치는데 쑤신다. 마우스 잡을 때마다 신호가 온다. 해답을 찾고 싶었다. 없다. 있다면 실천이다. 실천이 안 된다. "일을 줄여라." 못 줄인다. 줄이면 경쟁에서 밀린다. "운동을 해라." 시간이 없다. 만들어야 하는데 못 만든다. "병원에 가라." 간다. 약 받는다. 안 낫는다. 생활습관이 문제다. 결국 선택이다. 건강을 택하거나, 일을 택하거나. 나는 계속 일을 택한다. 그래서 계속 아프다. 30대 게임 기획자의 솔직한 고백이다. 멋있지 않다. 슬프다. 하지만 진짜다.손목 보호대 끼고 엑셀 켰다. 오늘도 밸런스 잡는다.

프로그래머와의 첫 구현 회의: 기획의도는 죽는다

프로그래머와의 첫 구현 회의: 기획의도는 죽는다

프로그래머와의 첫 구현 회의: 기획의도는 죽는다 오전 10시, 희망에 찬 기획서 회의실 예약했다. 10시 30분. 프로그래머 두 명, 나. 어젯밤까지 쓴 기획서 준비됐다. "이번 스킬 시스템은 완벽해." 3주 동안 경쟁작 분석했다. 밸런스 시뮬레이션 100번 돌렸다. 유저 피드백 200개 정리했다. 엑셀 시트 15개. 기획의도는 명확했다. "스킬 조합의 재미." 최대 5개 스킬 동시 발동. 각 스킬마다 시너지 효과. 조합 가능 수 126가지. 프린트한 기획서 두께 1cm. 이거면 된다고 생각했다.10시 31분, 첫 질문 "형, 이거 실시간이에요?" 프로그래머 민수. 경력 7년차, 서버 개발. 항상 핵심을 찌른다. "네, 스킬 발동하면 즉시 판정이요." "동시 발동이 5개요?" "네." "그럼 서버에서 매번 조합 계산해야 되는데." 엑셀 시트 넘겼다. 조합별 시너지 테이블. 126가지 경우의 수. "이거 다 DB 조회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네요." 민수가 계산기 두드렸다. 동시접속 3000명 가정. 초당 스킬 사용 평균 5회. DB 조회 3000 x 5 x 5 = 75,000 쿼리. "서버 죽습니다." 회의 시작 1분 만에. 기획의도 1차 사망. 10시 45분, 대안 찾기 "그럼 캐싱하면 되지 않나요?" 클라이언트 개발 지훈이가 말했다. 경력 3년, 유니티 전문. "조합 테이블 전부 클라에 들고 있으면요." 민수가 고개 저었다. "126가지 조합인데, 스킬이 50개면 몇 개죠?" "계산 안 해봐도... 많죠." 지훈이가 덧붙였다. "그리고 밸런스 패치 때마다 클라 업데이트요?" "앱스토어 심사 2주 기다리고요." 아. 생각 못 했다. "실시간이 아니면 안 돼요?" 민수가 물었다. 기획의도는 '즉각 피드백'이었다. 스킬 누르면 바로 효과. 타격감, 폭발감, 쾌감. "...안 되는데." "그럼 조합 수 줄이셔야 돼요." 126가지에서 얼마로? "20개 정도면." 1/6로 줄이라고.11시 10분, 성능 이슈 20개로 줄였다. 스킬 조합 20가지.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형, 이펙트는요?" 지훈이가 물었다. "스킬마다 고유 이펙트 있고, 조합 시너지 이펙트 추가로요." 기획서 7페이지 펼쳤다. 조합별 이펙트 연출안. 화려하게 터지는 거. "이펙트 20개 동시 재생이요?" "응, 5개 스킬 + 시너지 이펙트들." 지훈이 표정이 어두워졌다. "저사양 폰 죽어요." "요즘 폰 성능 좋잖아요." "타겟 유저 50%는 3년 전 폰 써요." 아. 또 생각 못 했다. "파티클 수 줄이면 되지 않아요?" "줄이면 이펙트가 화려하지 않은데요." 기획의도는 '화려한 연출'이었다. 유튜브 숏츠에 올라갈 만한 거. 바이럴 날 만한 거. "프레임 30 아래로 떨어지면 유저들 난리 나요." 지훈이가 유저 리뷰 캡처 보여줬다. "최적화 똥겜" "갤럭시 S9에서 렉 걸림" "환불해주세요" 기획의도 2차 사망. 11시 40분, API 한계 "서버 부하 줄이려면 턴제로 가는 게." 민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턴제요?" "네, 실시간 말고 턴 기반 전투." 기획서 1페이지. "실시간 액션 RPG" "그럼 장르가 바뀌잖아요." "장르 안 바뀌고는 이 기획 못 살려요."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민수가 계속 설명했다. 현재 서버 아키텍처는 턴제 최적화. 실시간 동기화 구조 없음. 새로 만들려면 2달. 인력 3명 투입. "PD님이 허락 안 하실 텐데요." 일정은 이미 타이트했다. 런칭 4개월 남았다. 새 시스템 개발 시간 없다. "그럼 스킬 발동을 순차적으로 하면요?" 내가 물었다. "그럼 '동시 발동'이 아니잖아요." 기획서 3페이지. "최대 5개 스킬 동시 발동" "순차 발동이랑 동시 발동이랑 재미가 다른데." "형, 재미는 저도 알아요. 근데 못 만들어요." 민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API 한계예요. 지금 구조로는 안 돼요."12시 10분, 타협안 회의 1시간 40분. 점심시간 넘어갔다. 화이트보드 가득 적힌 제약사항들.서버: 동시 처리 불가 클라: 이펙트 최적화 필요 일정: 2달 이상 작업 불가 구조: 턴제 기반"그럼 이렇게 하면 어때요." 내가 화이트보드에 썼다.스킬 조합 10가지로 축소 동시 발동 → 0.5초 간격 순차 발동 이펙트 단순화, 저사양 모드 추가 조합 테이블 클라 캐싱"이 정도면 할 만해요?" 민수랑 지훈이가 고개 끄덕였다. "개발 기간은요?" "3주요." "테스트 포함해서요?" "...4주요." 일정표 다시 짰다. 다른 기능들 미루고. 이거 먼저 넣고. "OK, 그럼 이걸로 PD님한테." 회의 끝. 기획서는 반토막 났다. 15페이지에서 7페이지로. 126가지 조합에서 10가지로. 동시 발동에서 순차 발동으로. 처음 의도한 거랑 완전히 달라졌다. 오후 2시, 기획서 다시 쓰기 자리 돌아와서 엑셀 켰다. 조합 테이블 다시 짰다. 126가지에서 10가지 추리기. 가장 재밌을 거 같은 거. 가장 밸런스 잡힌 거. 3주 작업이 3시간으로. 기획의도는 뭐였나. "스킬 조합의 재미" 10가지도 재밌을까? 126가지만큼? 모르겠다. 만들어봐야 안다. 컨플루언스에 기획서 업데이트. 제목 수정. "스킬 동시 발동 시스템 v2.0 (구현 가능 버전)" 괄호 안 문구가 슬프다. 오후 4시, PD 보고 PD님 자리 찾아갔다. "시스템 기획 수정본이요." "많이 바뀌었네?" "네, 구현 검토하면서요." PD님이 기획서 훑었다. 10초 만에 핵심 파악. "조합 수 왜 줄었어?" "서버 부하 때문에요." "10개로 재미 나올까?" "...최선을 다해볼게요." PD님이 한숨 쉬었다. "우리가 만들고 싶은 거랑 만들 수 있는 거는 다르니까." "네." "유저들이 재밌어하면 그게 맞는 거야." "알겠습니다." 보고 끝. 돌아 나왔다. 복도에서 민수 마주쳤다. "형, PD님 뭐래요?" "오케이래." "다행이네. 근데 형 표정이 왜 그래요." "아니, 괜찮아." 괜찮지 않았다. 오후 6시, 혼자 생각 퇴근 전에 경쟁작 켰다. '킹덤 오브 레전드' 스킬 시스템 봤다. 조합 가능한 게 50가지 넘어 보였다. 실시간으로 터진다. 이펙트 화려하다. 프레임 드랍 없다. "얘네는 어떻게 한 거지?" 개발 기간 2년. 개발비 50억. 개발팀 80명. 우리는 4개월에 15명. 답 나왔다. 창 닫았다. 기획자의 숙명이다. 머릿속 완벽한 기획. 현실에선 반의반. "API 한계" "성능 이슈" "일정 부족" "인력 부족" 이 단어들 앞에서. 기획의도는 맥없이 죽는다. 그래도 만들어야 한다. 10가지 조합이라도. 순차 발동이라도. 단순한 이펙트라도. 유저가 재밌다고 하면. 그게 정답이다. 오후 8시, 퇴근길 회사 나섰다. 편의점 들렀다. 에너지 드링크 샀다. 집 가는 지하철. 핸드폰으로 엑셀 열었다. 10가지 조합 밸런스 체크. 옆자리 사람이 쳐다봤다. "저 사람 왜 지하철에서 엑셀을." 퇴근길에도 일한다. 기획자니까. 다음 정거장 도착 안내방송. 핸드폰 꺼졌다. 배터리 없다. 창밖 봤다. 어둡다. 내일 또 회의 있다. "UI 구현 검토 회의" 또 죽겠지. 기획의도.프로그래머가 "안 돼요"라고 하면, 기획자는 기획서를 다시 쓴다. 이게 현실이다.

유저 데이터를 보면: 계획은 이렇게 무너진다

유저 데이터를 보면: 계획은 이렇게 무너진다

유저 데이터를 보면: 계획은 이렇게 무너진다 월요일 아침, 데이터 앞에서 출근했다. 커피부터 뽑았다. 엑셀 파일 열었다. 지난주 금요일 업데이트 이후 유저 데이터다. 신규 스킬 3개 추가했다. 10레벨부터 사용 가능. 밸런스 완벽하게 잡았다고 생각했다. 스킬 사용률 컬럼을 봤다. 7%. 다시 봤다. 7%가 맞다. "뭐지?" 3개월 동안 기획했다. 수치 시뮬레이션 50번 넘게 돌렸다. 테스트 플레이도 했다. QA팀도 재밌다고 했다. 유저들이 환호할 줄 알았다. 7%다. 93%의 유저는 스킬이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기획자의 착각 회의실로 갔다. PD한테 물었다. "스킬 사용률 보셨어요?" "봤어. 왜 이래?" "제가 그걸 알면 여기 안 왔죠." 데이터를 펼쳤다. 유저 레벨별 스킬 사용률이다.레벨 10~15: 3% 레벨 16~20: 8% 레벨 21~25: 12% 레벨 26~30: 18%레벨 30 넘어가면 좀 쓴다. 그것도 20%가 안 된다. "스킬 강하잖아요. DPS 계산해보면 기본 공격보다 30% 높은데." "그럼 유저가 멍청한 건가?" 아니다. 유저는 멍청하지 않다. 내가 멍청한 거다. 기획자는 착각한다. 내가 만든 시스템을 유저가 당연히 이해할 거라고. 튜토리얼 한 번 보면 다 알 거라고. 수치가 좋으면 당연히 쓸 거라고. 틀렸다. 유저는 게임을 플레이한다. 시스템을 공부하지 않는다. 숫자를 계산하지 않는다. 그냥 느낌으로 누른다. 익숙한 걸 누른다. 새로운 건 귀찮다. 나는 3개월 동안 스킬 밸런스를 고민했다. 유저는 3초 동안 '이거 뭐지?' 하고 넘어간다. 격차가 이렇게 크다. 데이터를 뜯어보니 점심 먹고 돌아왔다. 데이터를 더 파봤다. 로그를 봤다. 유저 플레이 패턴이다. 프레임 단위로 찍혀 있다. 10레벨 유저 100명을 무작위로 뽑았다. 패턴이 보였다. 대부분 유저는 스킬 창을 안 연다. 연다고 해도 1초 보고 닫는다. 스킬을 등록하는 유저는 20%다. 등록해도 안 쓴다. 퀵슬롯에 등록하는 유저는 5%다. "아." 문제를 찾았다. 스킬이 약해서가 아니다. 유저가 스킬을 발견하지 못한다. UI를 봤다. 스킬 창은 메뉴의 세 번째 탭이다. 캐릭터 정보 탭 안에 숨어 있다. 아이콘이 작다. 신규 알림도 없다. 튜토리얼을 봤다. 스킬 설명은 15단계 중 11번째다. 텍스트로 설명한다. "레벨 10이 되면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게 끝이다. 유저는 튜토리얼을 스킵한다. 11단계까지 안 본다. 봐도 기억 안 한다. 나는 유저가 게임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플레이할 거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예상 vs 현실 기획서를 꺼냈다. 3개월 전에 쓴 거다. "스킬 시스템 기획서 v2.3" 목표 항목을 봤다.레벨 10 유저의 60%가 스킬 사용 스킬 사용 시 전투 만족도 상승 과금 유저의 스킬 강화 유도예상이었다. 현실은 이렇다.레벨 10 유저의 3%가 스킬 사용 대부분 유저는 스킬이 있는지 모름 과금은 커녕 존재 자체를 인식 못함기획 의도를 읽었다. "유저들이 레벨 10이 되면 전투가 지루해집니다. 스킬 시스템으로 전투에 깊이를 더하고 성장 동기를 부여합니다." 맞는 말이다. 의도는 좋았다. 실행이 망했다. 나는 유저가 이렇게 플레이할 거라고 상상했다.레벨 10 달성 스킬 해금 알림 확인 스킬 창 열어서 확인 강한 스킬 선택해서 등록 전투에서 사용 "오 재밌네" 하고 계속 사용실제로는 이렇다.레벨 10 달성 다음 퀘스트 진행 끝스킬? 본 적도 없다. 나는 게임을 100시간 플레이한 사람의 시점으로 기획했다. 유저는 1시간 플레이한 사람의 시점으로 게임한다. 간극이 이렇게 크다. 왜 안 쓰는가 데이터를 더 파봤다. 스킬을 실제로 사용한 7%의 유저다. 얘네는 왜 썼을까. 로그를 분석했다.길드 가입자: 스킬 사용률 35% 커뮤니티 활동 유저: 스킬 사용률 28% 친구 3명 이상: 스킬 사용률 22% 혼자 플레이: 스킬 사용률 1%보인다. 스킬을 쓰는 유저는 누군가한테 들었다. "야 레벨 10 되면 스킬 써봐. 개쩐다." 게임이 알려준 게 아니다. 다른 유저가 알려줬다. 나는 게임 내 시스템으로 유저를 교육할 수 있다고 믿었다. 틀렸다. 유저는 게임을 믿지 않는다. 다른 유저를 믿는다. 튜토리얼은 스킵한다. 친구 말은 듣는다. 그럼 93%의 유저는? 친구가 없거나 커뮤니티 안 한다. 혼자 조용히 게임한다. 스킬이 있는지도 모른다. 더 파봤다. 스킬을 발견했지만 안 쓰는 유저들이다. 20%쯤 된다. 이유를 찾아봤다. 로그를 봤다. 스킬 창을 열었다. 5초 봤다. 닫았다. 안 썼다. 왜? 스킬 설명을 봤다. "적에게 150%의 피해를 주고 3초간 기절시킵니다. 쿨타임 12초. 마나 소모 45." 나는 이게 명확하다고 생각했다. 유저는 이렇게 생각한다. "150%가 뭔데? 지금보다 강한 건가? 기절이 필요한가? 쿨타임 12초면 긴 건가? 마나 45면 많은 건가?" 비교 대상이 없다. 유저는 판단할 수 없다. 그래서 안 쓴다. 익숙한 게 편하다. 나는 숫자를 주면 유저가 계산할 거라고 생각했다. 유저는 계산 안 한다. 느낌으로 판단한다. 느낌이 안 오면 안 쓴다.긴급 회의 오후 3시. PD가 불렀다. "이거 어떻게 할 건데?" "UI 수정하고 튜토리얼 바꿔야 될 것 같아요." "시간 얼마나?" "2주요." "다음 주 업데이트 있는데." 알고 있다. 다음 주 업데이트는 신규 던전이다. 2개월 작업했다. 이것도 중요하다. "스킬 사용률 이대로 두면 신규 던전 밸런스 다 깨져요." 신규 던전은 스킬 사용 기준으로 난이도를 잡았다. 스킬 안 쓰면 클리어 불가능하다. 유저가 스킬을 안 쓰면 던전을 못 깬다. 리뷰 폭탄 맞는다. "그럼?" "던전 난이도 낮추고 스킬 튜토리얼 먼저 넣어야죠." PD가 한숨 쉬었다. "개발팀한테 얘기해봐." 개발팀장을 찾아갔다. 사정했다. "UI 수정 급하게 부탁드립니다." "뭐 또?" "스킬 아이콘 크게 하고 알림 팝업 넣어야 돼요." "다음 주 빌드 올라가는데?" 알고 있다. 미안하다. 기획을 잘못했다. "꼭 필요합니다." 개발팀장이 담배 피우러 갔다. 돌아와서 말했다. "이번 주 야근 각오해." 고맙다. 미안하다. 수정 작업 화요일. UI 수정안을 그렸다. 변경 사항:레벨 10 달성 시 스킬 강제 튜토리얼 스킬 아이콘 2배 크기 신규 스킬 빨간 점 표시 퀵슬롯 등록 가이드 첫 사용 시 데미지 비교 표시시안을 그렸다. 아티스트한테 넘겼다. 급하게 작업 부탁했다. 스킬 설명도 바꿨다. 기존: "적에게 150%의 피해를 주고 3초간 기절시킵니다." 수정: "일반 공격보다 2배 강합니다! 적을 기절시켜 안전하게 싸우세요." 숫자를 뺐다. 비교 표현을 넣었다. 유저는 "2배"를 이해한다. "150%"는 모른다. 개발팀이 구현했다. 목요일에 테스트 빌드 나왔다. QA팀이 돌렸다. 버그 3개 나왔다. 수정했다. 다시 테스트했다. 통과했다. 금요일 오전. 업데이트 준비 완료. 오후 2시. 배포했다. 데이터를 기다리며 주말이 지났다. 월요일 아침이다. 출근했다. 커피 뽑았다. 손이 떨렸다. 엑셀 열었다. 주말 데이터다. 스킬 사용률 컬럼을 봤다. 38%. 다시 봤다. 38%가 맞다. 레벨별로 봤다.레벨 10~15: 35% 레벨 16~20: 42% 레벨 21~25: 45%올랐다. 7%에서 38%다. 5배 이상 증가했다. 유저 리뷰를 봤다. "레벨 10 되니까 스킬 주네요. 개쩔어요." "튜토리얼이 친절해졌네. 전엔 몰랐는데." "스킬 쓰니까 전투가 재밌어요." PD한테 보고했다. "스킬 사용률 38%입니다." "잘했네." "목표가 60%였는데." "그래도 올랐잖아." 맞다. 올랐다. 5배 올랐다. 근데 목표의 절반이다. 나는 완벽한 밸런스를 만들었다. 유저는 발견하지 못했다. UI를 고쳤다. 유저가 사용했다. 깨달았다. 기획은 밸런스가 아니다. 발견이다. 아무리 좋은 시스템도 유저가 모르면 없는 거다. 숫자가 완벽해도 유저가 안 쓰면 의미 없다. 유저는 게임을 공부하지 않는다. 그냥 논다. 자연스럽게 발견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거다. 나는 3개월 동안 밸런스를 잡았다. 정작 중요한 건 "유저가 찾을 수 있는가"였다. 남은 문제 화요일. 추가 데이터를 봤다. 스킬 사용률은 38%에서 멈췄다. 더 안 올라간다. 나머지 62%는 왜 안 쓸까. 로그를 파봤다. 튜토리얼을 스킵한 유저들이다. 30%쯤 된다. 튜토리얼 자체를 안 봤다. 당연히 스킬도 모른다. 강제 튜토리얼인데 어떻게 스킵하나? 유저는 방법을 찾는다. 빠르게 클릭해서 넘긴다. 화면 안 보고 터치한다. 유저를 과소평가했다. 유저는 생각보다 게임을 안 본다. 나머지 32%는 튜토리얼을 봤다. 스킬도 안다. 그래도 안 쓴다. 왜? 유저 레벨을 봤다. 대부분 5~8레벨이다. 아직 10레벨이 안 됐다. 튜토리얼을 봤지만 스킬을 못 쓴다. 10레벨이 되면 잊어버린다. "아." 또 문제를 찾았다. 튜토리얼 타이밍이 틀렸다. 레벨 1에 스킬을 설명한다. 유저는 레벨 10에 쓴다. 9레벨의 간격이 있다. 유저는 잊어버린다. 수정안을 썼다. 튜토리얼을 레벨 10 달성 직후로 옮긴다. 바로 스킬을 쓰게 한다. PD한테 보고했다. "튜토리얼 타이밍 수정 필요합니다." "또?" "사용률 60% 만들려면 필요해요." 한숨 쉬었다. 승인했다. 개발 일정 잡았다. 다음 주 업데이트다. 또 야근이다. 배운 것들 수요일 저녁. 혼자 남아서 데이터를 봤다. 3개월 작업했다. 1주일 만에 갈아엎었다. 아직도 목표 달성 못 했다. 뭘 배웠나. 첫째, 유저는 숫자를 안 본다. 느낌으로 판단한다. "150% 데미지"보다 "2배 강함"이 낫다. 비교 대상을 명확하게 줘야 한다. 둘째, 유저는 게임을 공부 안 한다. 자연스럽게 발견되게 만들어야 한다. 숨겨진 시스템은 없는 시스템이다. 셋째, 튜토리얼은 타이밍이다. 너무 빠르면 잊어버린다. 필요한 순간에 알려줘야 한다. 넷째, 기획자의 예상은 틀린다. 항상 틀린다. 데이터로 검증해야 한다. 출시 전에 알 수 없다. 다섯째, 유저는 기획 의도를 모른다. 관심도 없다. 그냥 재밌으면 한다. 재미없으면 안 한다. 여섯째, 완벽한 밸런스보다 명확한 UI가 낫다. 발견되지 않는 밸런스는 의미 없다. 일곱째, 유저 간 소통이 게임보다 강하다. 친구 말을 듣는다. 게임 설명은 스킵한다. 여덟째, 혼자 플레이하는 유저가 대부분이다. 이들을 위한 가이드가 필요하다. 아홉째, 기획서는 가설이다. 출시는 실험이다. 데이터는 결과다. 틀리면 수정한다. 열째, 야근은 기본이다. 2주 후 스킬 사용률이 52%가 됐다. 목표 60%보다 낮지만 나쁘지 않다. 절반 넘는 유저가 쓴다. 신규 던전 클리어율도 괜찮다. 스킬 쓰는 유저는 90% 클리어한다. 안 쓰는 유저는 30%다. 리뷰는 좋아졌다. "전투가 재밌어졌어요." "스킬 짱이에요." 나쁜 리뷰도 있다. "스킬이 복잡해요." "설명이 부족해요." 맞다. 아직 부족하다. PD가 말했다. "다음 업데이트 때 스킬 2개 더 추가해." 또 시작이다. 기획서를 펼쳤다. 이번엔 다르게 해야 한다. 유저 관점으로 생각했다. 숫자가 아니라 느낌으로. 발견을 먼저 고민했다. 밸런스는 그다음이다. 기획서 첫 줄에 썼다. "유저는 이 스킬을 어떻게 발견하는가?" 이게 먼저다.계획은 항상 무너진다. 데이터 앞에서 겸손해진다.

PD가 '재밌게 해줘'라고 할 때 느끼는 무력감

PD가 '재밌게 해줘'라고 할 때 느끼는 무력감

PD가 '재밌게 해줘'라고 할 때 느끼는 무력감 오전 10시, 그 한마디 회의실 들어갔다. PD가 프로토타입 플레이했다. "이거... 재미가 없는데?" 알고 있다. 나도 안다. "좀 더 재밌게 해줘." ...네? 회의 끝. 30분 동안 '재미'라는 단어 17번 들었다. 구체적인 피드백은 없었다. "그냥 재밌게"가 전부다. 책상 앞에 앉았다. 엑셀 파일 열었다. 데미지 테이블, 성장 곡선, 보상 밸런스. 어디를 어떻게 고쳐야 '재밌어'지는 거냐.재미는 주관이다. 내가 재밌으면 유저는 노잼이고, 유저가 재밌으면 PD는 지루하다고 한다. 그럼 재미가 뭔데. 재미의 정의를 찾아서 점심 먹으면서 기획팀 막내한테 물었다. "너는 게임 재미가 뭐라고 생각해?" "...도전과 보상의 균형?" 교과서다. 게임 기획론 3장 내용이다. 프로그래머한테도 물었다. "버그 없는 거요." 틀린 말은 아니다. 오후 3시. 다시 회의. 이번엔 구체적으로 물어봤다. "PD님, 어떤 부분이 재미없었나요?" "전체적으로?" "예를 들면 전투 템포요? 보상 간격이요?" "응... 그냥 다?" 입 다물었다. 더 물어봐야 '감으로 해'라는 답만 돌아온다.회의 끝나고 자리 돌아왔다. Confluence 기획서 열었다. '재미 요소' 항목 있다. 6개월 전 내가 썼다.명확한 목표 설정 적절한 난이도 곡선 즉각적인 피드백 차별화된 보상이론은 다 있다. 근데 어디서부터 고쳐야 하냐는 답이 없다. 결국 재미는 숫자로 증명해야 한다. 플레이 타임, 리텐션, 매출. 이 셋으로 정의된다. 재미있으면 오래 한다. 오래 하면 돌아온다. 돌아오면 돈 쓴다. 이게 우리가 말하는 '재미'다. 숫자가 된 재미 저녁 7시. QA팀에서 리포트 왔다. "튜토리얼 이탈률 35%" 높다. 너무 높다. 프로토타입 테스터 10명 중 3명이 10분 안에 껐다는 뜻이다. 재미가 없다는 증거다. 어디가 문제일까. 튜토리얼 플로우 다시 봤다.스토리 인트로 (스킵 가능) 기본 조작 설명 첫 전투 캐릭터 강화 유도 다음 스테이지 진행플로우는 표준이다. 다른 게임이랑 똑같다. 그럼 뭐가 문제냐. 전투가 지루한가. 데미지 수치를 올려볼까. 아니면 적 체력을 낮출까. 보상을 더 줄까. 엑셀 켰다. 시뮬레이션 돌렸다.케이스 1: 데미지 20% 상승전투 시간 30초 → 24초 예상 리텐션 변화: 미미케이스 2: 튜토리얼 보상 2배초반 성장 속도 증가 중반 밸런스 붕괴 우려케이스 3: 튜토리얼 스킵 기능 강화이탈 방지 효과 불명 핵심 시스템 미습득 리스크시뮬 결과 봤다. 답이 안 나온다. 숫자는 결과만 보여준다. 왜 재미없는지는 안 알려준다. 재미는 정성이다. 근데 우리는 정량으로 평가한다. 모순이다. 유저 데이터는 말한다 밤 10시. 아직 회사다. 모니터 3개 켜놨다. 왼쪽은 엑셀, 가운데는 Unity, 오른쪽은 유저 피드백. CBT 끝나고 설문 결과 정리했다. "전투가 단조롭다" - 18명 "보상이 짜다" - 12명"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 9명 "재밌다" - 3명 재밌다는 사람이 3명이다. 42명 중 3명. PD 말이 맞았다. 재미없다. 근데 어떻게 고쳐야 하냐고. "전투가 단조롭다"는 피드백 뜯어봤다. 구체적인 내용 없다. 그냥 단조롭다는 것만 안다. 스킬 종류를 늘릴까. 아니면 전투 연출을 화려하게 할까. 적 패턴을 다양화할까. 전부 개발 리소스다. 시간이다. 돈이다. PD한테 물었다. "어디에 리소스 쓸까요?" "기획자가 판단해." 판단 기준을 달라고 했다. "재미있게 되는 쪽으로." 다시 원점이다. 결국 매출 예측 시뮬 돌렸다. 각 케이스별로 ARPU, LTV 계산했다. 재미는 모르겠다. 근데 돈은 계산된다. 재미와 매출 사이 새벽 1시. 퇴근 준비했다. 오늘 하루 '재미'라는 단어 58번 들었다. 카운트했다. 구체적인 액션 아이템은 3개다.튜토리얼 전투 속도 15% 증가 초반 보상 30% 상승 스킵 버튼 위치 조정이게 재미를 만들까. 모르겠다. 근데 해야 한다. 게임 기획자는 재미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게 직업이다. 근데 재미의 정의는 없다. 있는 건 숫자뿐이다. DAU, 리텐션, ARPU, LTV, ARPPU, CVR. 이 숫자들이 올라가면 '재밌다'고 한다. 내려가면 '재미없다'고 한다. 유저는 "꿀잼"이라고 한다. 그리고 3일 뒤 안 들어온다. 리텐션 7일차 40%. 재밌으면 60%는 남아야 한다. 결국 재미는 숫자다. 우리 업계에서는. 집 가는 지하철 안에서 생각했다. 내가 게임 기획자 된 이유가 뭐였지. 재밌는 게임 만들고 싶어서였다. 근데 지금 나는 엑셀 돌리고, 데이터 분석하고, 회의에서 '재밌게'라는 말만 듣는다. 실제로 게임 만드는 시간은 하루에 2시간도 안 된다. 그래도 계속하는 이유 다음날 출근했다. 어제 조정한 밸런스 빌드 나왔다. 플레이해봤다. 튜토리얼 전투 24초. 6초 줄었다. 확실히 빠르다. 보상도 늘었다. 초반 성장 체감된다. 재밌나? ...모르겠다. 근데 어제보단 낫다. 점심시간. 테스터 막내가 말했다. "어제보다 나은데요? 좀 더 당기네요." '당긴다'. 좋은 표현이다. 재미있다는 건 아니다. 근데 당긴다. 계속하고 싶게 만든다. 그게 우리가 만드는 재미다. 이상적인 재미는 아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재미도 아니다. 근데 현실적인 재미다. 숫자로 증명되는 재미다. 오후 회의. PD가 빌드 플레이했다. "어? 이거 괜찮은데?" 구체적인 건 없다. 근데 긍정적이다. "이 방향으로 계속 가보자." 회의 끝. 30분 동안 '괜찮다'는 말 12번 들었다. 어제는 '재미없다' 17번이었다. 발전이다.'재밌게 해줘'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주문이다. 근데 어쨌든 해야 한다. 그게 내 일이니까.

밤 11시, 유저 피드백을 읽으며 자책하는 게임 기획자

밤 11시, 유저 피드백을 읽으며 자책하는 게임 기획자

밤 11시 47분 모니터가 눈부시다. 사무실 불 다 꺼졌는데 내 자리만 밝다. 커뮤니티 탭 4개 띄워놨다. 인벤, 디시, 공식 카페, 레딧. 새로고침 누르는 손가락이 아프다. "이 게임 밸런스는 기획자가 게임을 안 하나봄" 100번째 읽는 댓글이다. 같은 내용. 다른 표현.손목이 욱신거린다. 마우스 쥔 채로 3시간째다. 이미 고쳤는데 "SSR 확률 0.5%는 사기임. 최소 1%는 돼야지" 다음 주 패치에 0.8%로 올린다. 이미 결정됐다. QA 테스트 중이다. "탱커 너무 약함. 15초 버티기도 힘듦" 어제 밸런스 시뮬 돌렸다. 방어력 15% 상향, 체력 회복량 20% 증가. 이번 주 금요일 적용. "코인 파밍이 너무 빡셈. 하루 3시간 해야 겨우 10개" 보상 2배 이벤트 다음 달 1일부터다. 상시 드랍률도 1.5배 올린다. 다 계획 있다. 다 준비 중이다. 근데 왜 욕먹냐.엑셀 파일 열었다. '6월_밸런스_패치_최종_진짜최종_v7.xlsx' 시뮬레이션 3000번 돌렸다. 경우의 수 다 따졌다. 밤새워서. 유저들은 모른다. 이게 얼마나 걸리는지. 소통의 문제 PD가 말했다. "유저 커뮤니케이션 강화하자." 좋다. 나도 원한다. 근데 뭘 어떻게. 공지 올려봤자 안 읽는다. "공지 보고 오셈 ㅋㅋ" 댓글만 달린다. 개발자 노트 써봤자 세 줄 요약 달린다. 그것도 왜곡돼서. 실시간 답변해봤자 "그래서 언제 고침?" 나온다. 다음 주면 고친다고. 지금 QA 중이라고. "다음 주면 게임 접어 ㅋㅋ" 접지 마. 제발. 커피 한 모금 마셨다. 식었다. 네 번째 컵이다. 2주 전 기억 런칭 후 첫 밸런스 패치. SSR 캐릭터 '시리우스' 너프. 공격력 30% 감소. 데이터가 말해줬다. 승률 78%. 픽률 95%. 이건 망하는 거다. 시뮬 100번 돌렸다. 25% 감소도 해봤다. 20%도 해봤다. 30%가 적정이었다. 수학적으로. 패치 적용했다. 커뮤니티가 불탔다. "과금 유도 ㅋㅋ 강캐 너프해서 다른 캐릭 팔려고" "3만원 썼는데 너프라니 환불각" "기획자 게임 접어라" PD가 불렀다. "유저 반응 심각한데요?" 데이터 보여줬다. 너프 후 승률 52%. 완벽하다. "데이터는 그렇지만 유저 감정은..." 감정으로 밸런스 잡나.그 다음 주. 매출 15% 감소. 동접 20% 감소. 내 잘못이다. 숫자는 맞았는데 타이밍이 틀렸다. 할 계획인데 "신규 콘텐츠 없음? 할 거 없어서 접음" 다음 달 대규모 업데이트 온다. 레이드 던전 3개, 신규 캐릭터 5개, PvP 시즌제. 6개월 준비했다. 아직 발표 못 할 뿐이다. "이벤트가 재탕만 함. 성의 없음" 신규 이벤트 기획서 어제 제출했다. 승인 대기 중. 개발 일정 2주. "버그 신고한 지 한 달인데 아직도 안 고침" 우선순위 밀렸다. 크리티컬 버그 먼저 잡는다. 순서가 있다. 다 이유가 있다. 근데 설명할 수 없다. 회사 정책상 업데이트 2주 전에만 공지 가능. 미리 말하면 기밀 유출. 개발 일정 공개하면 지연될 때 더 욕먹는다. 버그 우선순위 설명하면 "그것도 못 고침?" 나온다. 그냥 욕먹는 게 낫다. 시계 봤다. 12시 8분. 해결했는데도 3일 전 패치. 탱커 방어력 20% 상향. 체력 회복 25% 증가. 2주 전 건의사항 그대로 반영했다. 기대했다. 이번엔 칭찬 나오겠지. 커뮤니티 들어갔다. "이제 고침? 늦었음. 이미 많이 접었음" "20%로는 부족함. 최소 30%는 돼야 함" "탱커 버프는 좋은데 딜러가 문제임. 왜 딜러는 안 건드림?" 딜러도 건드렸다. 다음 주 패치에. 그것도 계획 있다. 칭찬은 3개였다. 욕은 47개였다. 좋은 평가는 조용히 사라진다. 나쁜 평가는 계속 남는다. 엑셀 창 최소화했다. 볼 기력이 없다. 왜 소통이 안 되나 생각해봤다. 진짜로. 유저는 지금 불편하다. 당장 고쳐지길 원한다. 나는 2주 뒤를 본다. 그때 고쳐진다. 시간차가 문제다. 유저는 체감을 말한다. "탱커가 약해." 나는 데이터를 본다. "탱커 생존율 48%, 2% 상향 필요." 언어가 다르다. 유저는 결과를 원한다. "고쳐줘." 나는 과정을 안다. "QA 통과, 빌드 적용, 검수 완료, 패치 배포." 속도가 다르다. 스낵 하나 꺼냈다. 오늘 점심 이후 첫 식사다. 씹는데 맛이 없다. 내일 출근하면 10시 회의. PD가 물을 거다. "커뮤니티 반응 어때요?" "좋지 않습니다." "개선 방안은?" "다음 주 패치에 반영됩니다." "유저들은 만족할까요?" 모르겠다. 솔직히. 패치하면 좋아질까. 아니면 또 다른 불만 나올까. 밸런스는 끝이 없다. 하나 고치면 다른 게 깨진다. 시소 같다. 이쪽 올리면 저쪽 내려간다. 완벽한 중심은 없다. 숫자로는 완벽해도 체감은 다르다. 유저 1000명 중 800명 만족해도 200명 불만이 더 크게 들린다. 마우스 내려놨다. 손목이 아프다. 자책의 시간 내 잘못일까. 밸런스 설계가 잘못됐나. 시뮬이 부족했나. 아니면 소통 방식이 문제인가. 설명을 더 잘 했어야 했나. 공지문 다시 읽어봤다. "밸런스 개선 안내" 전문 용어 많다. 수치 나열만 있다. 감정이 없다. 유저 입장에서 다시 써봤다. "탱커 유저분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번 패치로 생존력이 크게 좋아집니다." 이게 낫나. 아니다. 이것도 이상하다. 게임 기획자가 감성팔이하면 안 된다. 데이터로 말해야 한다. 근데 데이터로 말하면 안 읽는다. 딜레마다. 모니터 껐다 켰다. 눈이 침침하다. 5년 차의 고민 신입 때는 몰랐다. 밸런스만 잘 잡으면 되는 줄 알았다. 수치만 완벽하면 되는 줄 알았다. 틀렸다. 게임 기획은 50%가 밸런스고 50%가 심리다. 유저가 뭘 원하는지. 언제 만족하는지. 어떻게 표현하는지. 숫자는 거짓말 안 한다. 근데 사람은 숫자대로 안 움직인다. 승률 50%가 완벽한 밸런스다. 이론상. 근데 유저는 60% 원한다. 자기가 쓰는 캐릭터는.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럼 뭐 하러 하나. 휴지통 봤다. 빈 캔 6개. 오늘 마신 커피다. 내일도 올라올 글 "밸런스 언제 고침?" 다음 주 고친다. "신규 콘텐츠 언제 나옴?" 다음 달 나온다. "기획자는 게임 하기나 함?" 매일 한다. 퇴근 후에도 한다. 댓글 달고 싶다. 근데 못 단다. 공식 계정 아니면 발언 금지. 회사 규정이다. 개인 계정으로 달면 신상 털린다. 전에 당한 선배 봤다. 그냥 참는다. 읽기만 한다. 가슴에 담는다. 스트레스로. 마우스 놨다. 손목에 파스 붙일 시간이다. 1시 12분 정리했다. 다음 주 패치: 탱커 상향, SSR 확률 증가, 보상 개선. 다음 달 업데이트: 레이드, 신규 캐릭, 이벤트 3종. 다음 분기 로드맵: PvP 시즌제, 길드 콘텐츠, 스토리 확장. 다 계획 있다. 다 준비 중이다. 근데 말 못 한다. 말해도 안 믿는다. "어차피 또 미룰 거" 안 미룬다. 이번엔. 가방 챙겼다. 노트북, 파스, 소화제. 불 껐다. 사무실 나왔다. 엘리베이터 타면서 핸드폰 봤다. 커뮤니티 알림 17개. 안 봤다. 내일 보자. 아니다. 지금 봐야 한다. 급한 버그일 수도 있다. 열었다. "기획자 일 안 하냐 밤 1시인데 공지 없음" 웃겼다. 웃음 안 나왔다.다음 주 패치 때 좋아해 주면 좋겠다. 근데 기대 안 한다. 이미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