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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기획
- 09 Dec, 2025
시즈널 콘텐츠 패치가 망했을 때의 심정
3개월의 노가다가 72시간 만에 3개월이었다. 기획 회의만 8번. 밸런스 시뮬레이션 돌린 횟수 47번. 엑셀 시트 버전 23개. QA 이슈 283건 처리. 런칭 전날 새벽 4시까지 최종 점검. 시즌2 '겨울의 전쟁' 콘텐츠. 신규 던전 5개, 보스 3체, 아이템 127종, 밸런스 패치 노트 A4 12페이지. PD가 말했다. "이번 시즌은 대박 난다." 목요일 오전 10시 패치 오픈. 점심때까지 동접 7만. "잘 되는 건가?" 오후 2시, 커뮤니티 게시판 새로고침. 3시, 계속 새로고침. 4시, 손이 떨렸다. "보상 쓰레기", "난이도 ㅈ같음", "3개월 준비한 게 이거?", "접는다 ㅂㅂ" 금요일 아침 회의실. 데이터 분석팀이 ppt 켰다. 그래프가 전부 빨간색이었다.숫자는 거짓말을 안 한다 "1일차 신규 콘텐츠 진입률 23%. 목표 대비 절반입니다." 침묵. "2일차 재진입률 8%. 작년 시즌1은 34%였습니다." 더 긴 침묵. "평균 플레이 타임 12분. 예상은 45분이었고요." PD가 노트북 덮었다. "원인 분석부터." 원인? 알고 있었다. 다 알고 있었다. 보스 체력 1.8배 올린 거. 보상 확률 0.3% 낮춘 거. 난이도 곡선 후반에 몰아넣은 거. 시뮬레이션에선 괜찮았다. 숫자상으론 완벽했다. 유저는 숫자가 아니었다. 오후 내내 유저 피드백 정리했다. 커뮤니티 댓글 350개, 인게임 문의 127건, 유튜브 리뷰 영상 8개. 전부 봤다. 하나하나 엑셀에 정리하면서 속이 타들어갔다. "보스 패턴 짜증", "보상 안 나옴", "시간 대비 효율 최악", "과금 유도 심함" 마지막 거는 억울했다. 과금 안 해도 깨라고 밸런스 잡았는데. 3주 동안 무과금 테스트 플레이 직접 했는데. 근데 유저는 그렇게 느꼈다. 밤 10시, 팀장이 말했다. "긴급 패치 준비합니다. 월요일 오전까지." 주말이 날아갔다.72시간 안에 3개월을 뜯어고치기 토요일 아침 11시 출근. 사무실에 벌써 7명. 다 눈이 풀려 있었다. 긴급 패치 회의. 화이트보드 가득 포스트잇. 뭘 고칠 건가. 어디까지 고칠 건가. 어떻게 고칠 건가. "보스 체력 30% 하향" "보상 확률 2배" "난이도 구간 재조정" "진입 조건 완화" PD가 물었다. "이거 하면 살아나나?" 모르겠다. 솔직히 모르겠다. 근데 안 하면 확실히 죽는다. 오후 2시부터 숫자 만지기 시작했다. 보스 체력 테이블 127개 셀 수정. 드랍 테이블 83개 라인 조정. 경험치 곡선 다시 그리기. 시뮬레이션 돌리고, 검증하고, 또 돌리고. 프로그래머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이거 구현하려면 빌드 새로 뽑아야 하는데." "알아요. 근데 해야죠." 저녁 8시, 치킨 시켰다. 먹으면서도 노트북 보고 있었다. 커뮤니티 반응 계속 체크. "패치 언제 하냐", "이대로면 접는다", "운영진 답 없음" 손이 떨렸다. 치킨이 목으로 안 넘어갔다. 밤 12시, 1차 검증 완료. 프로그래머랑 QA팀한테 넘겼다. "월요일 오전까지 부탁드립니다." "...네." 다들 알고 있었다. 이거 실패하면 시즌 망한다. 시즌 망하면 분기 실적 박살. 보너스 없다. 어쩌면 구조조정. 일요일 오후 4시, QA 이슈 17건. 치명적인 건 3개. 또 고쳤다. 시뮬 다시 돌렸다. 숫자 다시 맞췄다. 저녁 9시, 최종 빌드. PD한테 보고. "이거면 됩니까?" "...해봅시다." 월요일 새벽 6시 패치 공지 올렸다. 댓글이 실시간으로 달렸다. "이제야", "늦었다", "해보고 판단" 오전 10시 패치 완료. 손에 땀이 났다.숫자가 조금씩 올라갈 때 월요일 오후 2시, 첫 데이터 나왔다. 신규 콘텐츠 진입률 34%. 목표 46%보단 낮지만 23%보단 높다. 재진입률 19%. 8%에서 두 배 넘게 올랐다. 평균 플레이 타임 28분. 아직 목표 45분엔 못 미치지만. 커뮤니티 반응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할 만함", "보상이 체감된다", "패치 빠르네", "운영진 일 한다" 가슴이 뛰었다. 근데 아직 모른다. 하루 데이터론 모른다. 화요일, 수요일 데이터 계속 모니터링. 진입률 38%, 41%. 재진입률 23%, 26%. 플레이 타임 32분, 36분. 천천히 올랐다. 목요일 주간 회의. PD가 말했다. "일단 고비는 넘겼습니다. 근데 초기 목표 달성은 실패. 매출 목표 대비 67%. 다음 시즌 준비할 때 이번 거 복기 필수입니다." 실패였다. 숫자상으론 분명히 실패. 근데 최악은 면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생각했다. 뭐가 문제였을까. 시뮬레이션은 완벽했다. 숫자는 다 맞췄다. QA도 충분히 했다. 유저를 몰랐다. 유저가 뭘 재미있어하는지, 뭘 답답해하는지, 어느 지점에서 포기하는지. 데이터로 보고, 숫자로 계산했지만 그 뒤에 있는 사람은 못 봤다. 3개월 준비했지만 72시간 만에 무너졌다. 그리고 72시간 만에 다시 세웠다. 완벽하진 않지만 살아는 있다. 금요일 저녁 회식. 맥주 한 잔 마셨다. 팀장이 물었다. "다음 시즌은 어떻게 할 거야?" "모르겠어요. 근데 이번보단 나을 거 같아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번에 배웠으니까. 숫자만 믿으면 안 된다는 거. 유저는 엑셀 셀이 아니라는 거. 완벽한 기획서보다 빠른 대응이 중요하다는 거. 다음 주부터 시즌3 기획 시작이다. 또 3개월 준비한다. 또 불안하다. 또 실패할 수도 있다. 그래도 한다. 이게 내 일이니까.3개월은 3일 만에 무너지고, 3일 만에 다시 세운다. 완벽은 없다. 다만 덜 실패할 뿐.
- 07 Dec, 2025
게임은 사랑인데 회사가 문제다: 덕업일치의 함정
덕업일치라고 믿었던 그때대학교 3학년 때였다. 게임 동아리에서 밤새 게임하다가 문득 생각했다. "이거 직업으로 하면 되겠네." 주변 사람들은 다 말렸다. 부모님은 "게임이 무슨 직업이냐"며 공무원 시험을 권했다. 교수님은 "안정적인 대기업 가라"고 했다. 근데 나는 확신했다. 게임 기획자가 되면 하루 종일 게임 하면서 돈 버는 거라고. 좋아하는 걸로 밥 먹고사는 게 덕업일치라고. 지금 생각하면 웃긴다. 취업 준비 1년. 포트폴리오 20개 넘게 만들었다. 게임 플레이 분석, 시스템 기획서, 밸런스 시트. 밤새 작업한 거 면접에서 10분 만에 까였다. "이건 현실성이 없어요." 그래도 포기 안 했다. 게임은 사랑이니까. 입사했을 때 기뻤다. 드디어 꿈을 이뤘다고 생각했다. 신입 연봉 3200만원. 적지만 괜찮았다. 좋아하는 일 하는데 돈이 문제냐. 첫날 출근. 선배가 말했다. "게임 좋아해서 왔구나. 6개월 뒤에 얘기해보자." 그때는 무슨 소린지 몰랐다. 숫자가 재미를 이긴 날3개월 차. 첫 프로젝트 킥오프 미팅이었다. PD가 들어왔다. "이번 게임 목표 매출 200억입니다." 재미 얘기는 없었다. 매출 얘기만 2시간 했다. 과금 구조 먼저 짰다. 게임 시스템보다 결제 창이 먼저였다. 확률형 아이템 뽑기, 성장 구간별 과금 유도 포인트, 일일 미션 보상 설계. 내가 만들고 싶었던 건 이게 아니었다. "이 캐릭터 밸런스 너무 약한데요. 버프 좀 줘야죠." 내가 말했다. 개발자도 동의했다. 재미를 위해선 당연한 조정이었다. PD가 말했다. "이 캐릭터 과금 캐릭터예요. 약하면 안 팔려요. 유저가 강한 거 사게 놔둬요." 그날 처음 알았다. 밸런스 조정이 재미를 위한 게 아니라 매출을 위한 거란 걸. 엑셀 시트 열었다. 무과금 유저 성장 곡선, 소과금 유저 성장 곡선, 고과금 유저 성장 곡선. 세 그래프가 절묘하게 벌어지게 만들어야 했다. 무과금은 느려도 되고. 소과금은 적당히 빠르고. 고과금은 압도적으로. "이거 Pay to Win 아닌가요?" 내가 물었다. "그게 비즈니스 모델이에요." 선배가 대답했다. 유저 입장에선 똥겜이다. 기획자 입장에선 회사 지시다. 런칭 전날의 허무함 밤 11시. 사무실에 불 켜진 곳은 우리 팀뿐이었다. 런칭 D-1. 마지막 밸런스 조정 중이었다. 근데 우리가 조정한 게 아니었다. 운영팀 요청으로 과금 수치를 또 올렸다. "첫 주 매출이 중요해요. 초반 아이템 가격 20% 더 올려주세요." 프로그래머가 한숨 쉬었다. "이러면 유저들 욕하는데." PD가 말했다. "첫 주만 넘기면 돼요. 나중에 이벤트로 돌려주면 되죠." 나는 말이 안 나왔다. 새벽 2시. 최종 빌드 확인했다. 내가 6개월 동안 만든 게임이었다. 재밌었다. 시스템은 탄탄했다. 밸런스도 나름 괜찮았다. 근데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과금 압박이 너무 강했다. 10레벨까지 가려면 돈 쓰거나 2주 걸렸다. 경쟁 시스템은 과금 유저 잔치였다. 무과금은 구경만 하라는 설계. 동아리에서 밤새 했던 게임들이 떠올랐다. 그때는 재미있어서 했다. 돈 안 써도 됐다. 실력으로 이겼다. 지금 내가 만든 건 뭔가. 아티스트가 말했다. "우리 게임 너 할 거야?" 나는 대답 못 했다. 안 할 것 같았다. 내가 만들었는데. 유저 반응이 칼이 되는 순간런칭 당일. 오전 10시. 앱스토어 리뷰 새로고침 했다. 5분마다 댓글이 달렸다. "과금 압박 심하네", "무과금은 하지 마세요", "밸런스 개판". 가슴이 아팠다. 내 이름이 나온 건 아닌데 내 얘기 같았다. 내가 설계한 수치였으니까. 커뮤니티는 더 심했다. "기획자 머리에 뭐 들었나", "이걸 테스트도 안 하고 냈나", "매출만 생각하네". 맞는 말이었다. 실제로 매출만 생각했으니까. 오후 3시. 긴급 회의 소집됐다. 운영팀장이 말했다. "유저 반응 안 좋아요. 근데 매출은 목표치 90% 달성 중입니다." PD가 웃었다. "그럼 됐네요. 리뷰는 이벤트로 달래고." 기획팀장이 나를 봤다. "밸런스팀은 유저 달래는 이벤트 기획해줘요. 오늘 중으로." 내가 만든 문제를 내가 땜질하는 구조였다. 밤 10시. 이벤트 기획서 작성 중이었다. "무료 아이템 지급", "성장 구간 완화", "과금 아이템 할인". 땜질이었다. 근본적 해결이 아니었다. 어차피 다음 업데이트 때 또 과금 압박 강화할 거였다. 선배가 말했다. "적응해. 이게 현실이야." 나는 대답 안 했다. 적응하고 싶지 않았다. 회의실에서 죽는 기획 "이번 신규 콘텐츠는 레이드 던전입니다." 내가 발표했다. 기획서 40페이지. 2주 걸렸다. 협력 시스템, 역할 분담, 패턴 설계. 재미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PD가 물었다. "과금 포인트는?" 나는 대답했다. "실력으로 클리어 가능하게 만들었어요." 회의실 분위기가 싸해졌다. "다시 만들어와요. 과금 유저 전용 콘텐츠로." PD가 말했다. "무과금은 입장 티켓부터 막아요. 재화 소모 크게 하고." 내가 물었다. "그럼 유저 절반은 못 하는데요." PD가 대답했다. "그 절반이 매출 기여 0%예요." 기획서가 쓰레기통에 들어갔다. 2주가 날아갔다. 다시 만들었다. 입장 티켓 과금제, 보상 확률형, 강화 재료 판매. 재미는 빠지고 수익 모델만 남았다. 통과됐다. "이제 그럴듯하네요." PD가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개발자가 복도에서 말했다. "너도 힘들지?" 힘들었다. "처음엔 다 그래. 나도 게임 좋아서 왔거든." 그는 이제 게임 안 한다고 했다. 퇴근하면 영화 본다고. 게임은 질렸다고. 나도 그렇게 되는 건가. 덕업일치의 진실 1년 차 끝날 무렵. 친구를 만났다. "게임 회사 어때?" 친구가 물었다. "재밌어?" 나는 웃었다. "응. 재밌어." 거짓말이었다. 집에 와서 게임을 켰다. 다른 회사 게임이었다. 재밌었다. 2시간 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이 밸런스는 이렇게 짰구나.' '이 과금 구조는 저렇게 유도하네.' '이건 매출 목표가 얼마였을까.' 게임을 게임으로 못 보고 있었다. 전부 수치로 보였다. 기획 의도가 보였다. 비즈니스 모델이 보였다. 재미가 사라졌다. 예전엔 게임이 좋았다. 스토리에 몰입했고 전투가 짜릿했다. 레벨업이 기뻤고 아이템 획득이 즐거웠다. 지금은 다 계산이다. '이 구간 성장 속도 0.8배네.' '확률 테이블 너무 짜네.' '과금 압박 타이밍 여기서 주네.' 직업병이었다. 고칠 수 없었다. 게임을 사랑했다. 지금도 사랑한다. 근데 게임 회사는 싫다. 이게 모순이라는 걸 안다. 덕업일치. 좋아하는 걸 직업으로 삼으면 행복할 줄 알았다. 틀렸다. 좋아하는 걸 직업으로 삼으면 더 이상 좋아할 수 없게 된다. 그래도 퇴사는 못 한다 5년 차다. 연봉은 올랐다. 5200만원. 게임은 여전히 좋다. 근데 게임 회사는 여전히 싫다. 매일 아침 출근한다. 유저 피드백 확인한다. "밸런스 똥겜." 맞는 말이다. 내가 만들었으니까. 근데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팀 전체가, 회사 전체가 매출을 본다. 재미는 부차적이다. 유저 만족도는 지표일 뿐이다. 가끔 생각한다. 인디 게임 만들까. 매출 신경 안 쓰고 재미만 추구하는 게임. 근데 현실이 있다. 월세가 있고 생활비가 있다. 5200만원 버리고 월급 없이 못 산다. 동아리 후배가 연락 왔다. "형 회사 들어가고 싶어요." 나는 말했다. "다른 데 알아봐." "왜요? 형은 덕업일치 하잖아요." 덕업일치. 웃긴다. "응. 그래. 덕업일치야." 나는 거짓말했다. 오늘도 출근한다. 엑셀 연다. 밸런스 시트 수정한다. 과금 수치 조정한다. 유저는 욕한다. 회사는 매출 본다. 게임은 여전히 사랑한다. 퇴근하면 다른 게임 한다. 직업병으로 뜯어보면서. 회사가 문제다. 산업이 문제다. 구조가 문제다. 근데 나는 못 나간다. 이게 덕업일치의 함정이다.덕업일치는 환상이다. 좋아하는 걸 직업으로 삼는 순간 좋아할 수 없게 된다. 그래도 나는 오늘도 출근한다. 이게 현실이니까.
- 06 Dec, 2025
손목이 울고 있습니다: 게임 기획자의 직업병
손목이 울고 있습니다: 게임 기획자의 직업병 오늘도 손목은 비명을 지른다 아침 10시. 출근해서 마우스 잡는다. 손목이 쑤신다. 어제도 밤 10시까지 잡았던 그 마우스. 밤새 식지도 않았을 것 같다. 엑셀을 켠다. 밸런스 시트가 열린다. 숫자가 3000개쯤 된다. 하나하나 클릭해서 조정한다. 클릭, 드래그, 복사, 붙여넣기. 이게 내 일이다. 손목은 정직하다. 딱 2시간 지나면 신호를 보낸다. '이제 그만 좀 하자.' 무시한다. 일이 끝나야 쉴 수 있다. 일은 끝나지 않는다.오른손이 특히 심하다. 마우스 잡는 손. 5년간 쉬지 않고 일한 손. 손목터널증후군이라고 한다. 의사가 말했다. "직업을 바꾸시거나, 습관을 바꾸시거나." 직업을 바꿀 수 없다. 습관을 바꿀 수도 없다. 기획은 마우스로 하는 거다. 보호대를 샀다. 검은색 손목 보호대. 게임 기획자 10명 중 7명이 찬다. 우리의 훈장이다. 우리의 치욕이다. 의자가 내 몸을 기억한다 하루 10시간. 의자에 앉아있는 시간이다. 점심시간 빼면 9시간. 화장실 가는 시간 빼면 8시간 반. 그래도 10시간이 맞는 것 같다. 엉덩이가 의자 모양이 됐다. 허리는 C자다. 거북목은 기본이다. 어깨는 항상 굳어있다. 작년에 좋은 의자를 샀다. 80만원짜리. 회사가 50만원 지원해줬다. "직원 건강이 중요하니까요." 고맙다. 정말로. 의자는 좋다. 허리를 받쳐준다. 팔걸이 높이를 조절할 수 있다. 목 받침도 있다. 그래도 아프다. 10시간을 앉아있으면 어떤 의자든 소용없다.점심 먹고 졸음이 온다. 커피를 마신다. 다시 앉는다. 오후 3시쯤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한다. 30초. 다시 앉는다. 동료가 말한다. "형, 요즘 자세 더 구부정해진 것 같은데요?" 알고 있다. 거울 보면 알 수 있다. 모르는 척한다. "그래? 피곤해서 그런가." 정형외과에서 말했다. "허리 디스크 초기예요. 지금부터 관리 안 하면 30대 중반엔 위험합니다." 나는 지금 30살이다. 물리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일주일에 3번. 퇴근하고 가라고 했다. 퇴근이 8시다. 병원은 7시에 문 닫는다. 운동을 해야 한다는 건 안다 헬스장 등록했다. 3개월 끊었다. 20만원. 3번 갔다. 한 번에 6만 6천원 꼴이다. 비싼 샤워였다. 아침에 가려고 했다. 7시에 일어나야 한다. 못 일어났다. 어제 밤 12시에 잤다. 7시간도 못 잤다. 퇴근하고 가려고 했다. 8시 퇴근. 9시까지 갈 수 있다. 못 갔다. 야근이었다. 런칭 2주 전이다. 주말에 가려고 했다. 토요일 오전이면 된다. 못 갔다. 금요일 밤에 긴급 패치가 터졌다. 토요일 오후 2시에 일어났다. 몸이 안 움직였다.3개월이 지났다. 재등록 문자가 왔다. "회원님, 운동 효과 느끼셨죠? 재등록 하시면 10% 할인!" 안 느꼈다. 3번 갔다. 요가를 해볼까 생각했다. 유튜브 영상을 틀었다. "하루 10분이면 됩니다." 10분도 없다. 퇴근하면 9시다. 저녁 먹으면 10시다. 씻으면 11시다. 내일 밸런스 시트 봐야 한다. 걷기라도 하려고 했다. 출퇴근길에. 회사까지 2.5km. 걸으면 30분. 버스 타면 15분. 15분이 아깝다. 그 15분에 잠을 더 잔다. 동료 하나는 새벽 러닝을 한다. 5시 반에 일어나서 5km 뛴다. "형도 해봐요. 개운해요." 대단하다. 나는 못 한다. 런칭 끝나고 해볼까. 런칭은 3개월에 한 번씩 온다. 스트레칭 영상은 즐겨찾기에만 있다 유튜브 즐겨찾기에 영상이 12개 있다. 전부 스트레칭 영상이다. '거북목 해결', '손목터널증후군 완화', '허리디스크 예방'. 하나도 안 본다. 저장만 한다. '나중에 봐야지.' 나중은 오지 않는다. 저장한 게 6개월 전이다. 가끔 본다. 런칭 직후. 몸이 완전히 망가졌을 때. 영상을 틀고 따라한다. 5분. "아, 시원하다." 다음 날도 하려고 한다. 안 한다. 책상 옆에 폼롤러가 있다. 1년 전에 샀다. 쓴 횟수 10번 정도. 지금은 가방 거치대다. 회사에서 스트레칭 교육을 했다. 강사가 왔다. "여러분, 한 시간마다 일어나서 스트레칭 하세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안 한다. 점심시간에 산책하라고 했다. 회사 뒤에 공원이 있다. 10분이면 한 바퀴 돌 수 있다. 가본 적 없다. 점심 먹고 카페 가서 커피 마신다. 다시 일한다. 통증은 익숙해진다 아침에 일어나면 손목이 뻣뻣하다. 주먹을 쥐었다 펴는 데 30초 걸린다. 손가락이 굳어있다. 처음엔 무서웠다. '이거 큰일 나는 거 아닌가.' 병원 갔다. 약 받았다. 먹었다. 나았다. 다시 아팠다. 이제는 익숙하다. '오늘도 아프네.' 그냥 움직인다. 마우스를 잡는다. 일을 한다. 통증은 배경음악이 됐다. 허리도 그렇다. 오후 3시쯤 되면 쑤신다. '아, 또 이 시간이구나.' 자세를 바꾼다. 5분 버틴다. 다시 구부정해진다. 목도 그렇다. 고개를 돌리면 뚝뚝 소리가 난다. 20대 중반부터 났다. 이제 30살인데 소리가 더 커졌다. 동료들과 통증 자랑을 한다. "나 어제 손목 너무 아파서 마우스 왼손으로 잡았어." "나는 허리 때문에 서서 일했어." "나는 목 안 돌아가서 모니터를 옆으로 옮겼어." 웃으면서 한다. 웃기는 얘기가 아닌데 웃는다. 안 웃으면 슬프다. 진통제는 서랍에 항상 있다 책상 서랍을 연다. 진통제가 4통 있다. 타이레놀, 게보린, 이브, 펜잘.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 오늘은 손목이 아프다. 타이레놀을 먹는다. 30분 뒤 덜 아프다. 일을 계속한다. 내일은 허리가 아프다. 게보린을 먹는다. 1시간 뒤 덜 아프다. 일을 계속한다. 모레는 목이 아프다. 이브를 먹는다. 효과가 약하다. 펜잔을 추가로 먹는다. 일을 계속한다. 의사가 말했다. "진통제는 증상만 가리는 거예요. 근본적인 치료가 필요해요." 알고 있다. 치료할 시간이 없다. 약사가 말했다. "이거 자주 드시면 위에 안 좋아요." 알고 있다. 위도 이미 안 좋다. 야근하면서 커피 너무 많이 마셨다. 한 달에 진통제 40알 먹는다. 하루 평균 1.3알. 괜찮은 건가. 아닌 것 같다. 어쩔 수 없다. 30대가 두렵다 지금 30살이다. 5년 뒤면 35살이다. 이 상태로 5년 더 버틸 수 있을까. 선배가 있었다. 38살. 게임 기획 15년차. 손목 수술했다. 3개월 쉬었다. 복귀했다. 1년 뒤 퇴사했다. "더는 못 하겠더라." 다른 선배도 있었다. 40살. 허리디스크 수술했다. 6개월 쉬었다. 복귀 안 했다. 지금 프리랜서 컨설턴트 한다. 또 다른 선배는 35살에 목디스크 왔다. 지금도 일한다. 목에 보조기 차고. "돈 벌어야지 뭐." 슬프다. 내 미래가 보인다. 35살에 수술. 40살에 재수술. 45살에 은퇴. 아니면 평생 통증 안고 살기. 게임 기획이 좋다. 정말 좋다. 내가 만든 밸런스로 유저가 재밌어하면 뿌듯하다. 하지만 몸이 망가진다. 확실히 망가진다. 변명은 많다 "런칭 끝나면 운동할 거야." 런칭은 3개월마다 온다. 끝나고 나면 다음 런칭 준비다. "이번 프로젝트만 끝내면 쉴 거야." 프로젝트는 끝나지 않는다. 끝나면 새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연차 써서 병원 갈 거야." 연차는 썼다. 집에서 잤다. 병원은 안 갔다. "주말에 꼭 스트레칭 할 거야." 주말엔 피곤하다. 평일에 쌓인 피로를 푼다. 스트레칭은 다음 주말로. "다음 달부터 헬스장 다닐 거야." 다음 달이 왔다. 또 다음 달로 미룬다. 변명이 습관이 됐다. 나 자신한테 거짓말하는 게 익숙하다. 이러면 안 되는 거 안다. 바꾸는 게 어렵다. 회사는 신경 쓴다 (조금만) 회사가 간식을 준다. 과일, 빵, 요거트. 고맙다. 건강에 좋다. 손목은 안 나아진다. 회사가 안마의자를 뒀다. 3층 휴게실에. 점심시간에 쓸 수 있다. 줄이 길다. 5명 대기. 10분씩 쓴다. 내 차례 올 때까지 30분. 점심시간은 1시간. 밥 먹을 시간 없다. 회사가 스탠딩 책상을 줬다. 신청하면 바꿔준다. 3명 신청했다. 2명은 다시 일반 책상으로 바꿨다. "서 있으니까 다리 아파요." 회사가 재택근무를 준다. 주 1회. 화요일이나 목요일. 집에서 일한다. 더 오래 일한다. 출퇴근 시간만큼 더 일한다. 몸은 더 안 좋아진다. 회사는 노력한다. 인정한다.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일의 양을 줄이는 게 답이다. 그건 안 된다. 회사는 성장해야 한다. 동료들도 다 아프다 팀 회식 자리. 술 마시면서 하는 얘기. "형, 손목 어때요?" "망했지 뭐." 5명 중 4명이 손목 보호대 찬다. 나머지 1명은 신입이다. 1년 뒤면 찰 거다. 프로그래머들도 똑같다. 아티스트들도 똑같다. QA팀도 똑같다. 게임 회사는 다 아프다. "우리 이러다 다 같이 망가지는 거 아니야?" 누군가 웃으면서 말한다. 다들 웃는다. 맞는 말이라 웃는다. 정형외과 추천 리스트가 있다. 사내 위키에. 손목, 허리, 목 파트별로 정리돼 있다. 병원 이름, 의사 이름, 대기 시간까지. 슬픈 위키다. "○○병원 괜찮았어요?" "거기 좋아요. 근데 예약 2주 걸려요." "그럼 급할 땐 어디 가요?" "응급실요." 이게 정상이 아닌 건 안다. 하지만 이게 우리 일상이다. 그래도 못 멈춘다 손목이 아프다. 허리가 아프다. 목이 아프다. 그래도 출근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한다. '오늘은 일찍 퇴근해야지.' 저녁 9시에 퇴근한다. 내일은 꼭 스트레칭하겠다고 다짐한다. 내일도 안 한다. 이번 주말엔 운동하겠다고 약속한다. 주말에 집에서 잔다. 왜 못 멈출까. 일이 좋아서? 반은 맞다. 습관이라서? 반은 맞다. 두려워서일 수도 있다. 멈추면 뒤처질 것 같다. 쉬면 대체될 것 같다. 그래서 쉬지 못한다. 30살에 이미 몸이 망가졌다. 40살엔 어떻게 될까. 50살까지 일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해답은 없다 이 글을 쓰면서도 손목이 아프다. 키보드 치는데 쑤신다. 마우스 잡을 때마다 신호가 온다. 해답을 찾고 싶었다. 없다. 있다면 실천이다. 실천이 안 된다. "일을 줄여라." 못 줄인다. 줄이면 경쟁에서 밀린다. "운동을 해라." 시간이 없다. 만들어야 하는데 못 만든다. "병원에 가라." 간다. 약 받는다. 안 낫는다. 생활습관이 문제다. 결국 선택이다. 건강을 택하거나, 일을 택하거나. 나는 계속 일을 택한다. 그래서 계속 아프다. 30대 게임 기획자의 솔직한 고백이다. 멋있지 않다. 슬프다. 하지만 진짜다.손목 보호대 끼고 엑셀 켰다. 오늘도 밸런스 잡는다.
- 03 Dec, 2025
Excel 함수만으로 밸런스를 본다는 것
밸런스 기획자의 주무기 출근했다. 엑셀을 켰다. 프로그래머는 Visual Studio를 켠다. 아티스트는 Photoshop을 켠다. 나는 Excel을 켠다. 2013년부터 쓴 파일이다. 용량이 15MB다. 시트가 47개다. "게임 기획자는 엑셀만 잘 다루면 된다"는 말이 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엑셀을 잘 다루면 기획자 절반은 한 것이다. 나머지 절반은 그 엑셀로 만든 밸런스가 게임에서 제대로 작동하게 만드는 거다. 오늘도 밸런스 시트를 연다. 전투 시뮬레이터다. VLOOKUP과 IF문으로 떡칠된 지옥이다. 이게 내 직업이다.VLOOKUP이 인생의 전부인 날들 신입 때 선배가 말했다. "VLOOKUP 모르면 밸런스 기획 못 한다." 진짜였다. 캐릭터 스탯 시트가 있다. HP, 공격력, 방어력, 치명타율. 200개 캐릭터의 레벨별 수치가 여기 있다. 이걸 전투 시뮬레이터로 불러와야 한다. =VLOOKUP(A2, 캐릭터스탯!$A$2:$F$5000, 3, FALSE)이게 공격력이다. 숫자 하나 틀리면 밸런스가 무너진다. FALSE를 TRUE로 바꾸면 근삿값을 찾는다. 절대 안 된다. 정확한 값만. 시트가 47개인 이유다. 캐릭터 스탯, 무기 스탯, 스킬 데이터, 버프 효과, 적 스탯, 던전 난이도, 보상 테이블. 다 연결돼 있다. A 캐릭터의 공격력을 올리면 B 던전의 난이도가 변한다. C 무기의 가치가 떨어진다. D 캐릭터가 쓸모없어진다. VLOOKUP으로 다 연결했기 때문이다. 한 칸만 잘못 건드려도 게임이 망가진다. 그래서 시트 보호를 걸어뒀다. 비밀번호는 내 생일이다.IF문 지옥의 전투 시뮬레이터 전투 시뮬레이터를 만들었다. 3년 전이다. 시뮬레이터는 간단하다. 캐릭터 A와 적 B가 싸운다. 누가 이기는지 계산한다. 몇 턴 만에 이기는지 본다. 이게 밸런스의 기준이다. 문제는 변수다. 게임은 단순하지 않다.치명타가 터지면? 데미지 1.5배 버프를 받으면? 공격력 20% 증가 스킬을 쓰면? 3턴 쿨타임 적이 방어 태세면? 데미지 50% 감소 HP가 30% 이하면? 광폭화 버프IF문이 시작된다. =IF(치명타율>RAND(), 데미지*1.5, 데미지)이게 1턴이다. 치명타 계산이다. RAND()는 0~1 사이 랜덤값이다. 치명타율 30%면 30% 확률로 1.5배 데미지가 나간다. 여기에 버프를 추가한다. =IF(버프중, IF(치명타율>RAND(), 데미지*1.2*1.5, 데미지*1.2), IF(치명타율>RAND(), 데미지*1.5, 데미지))IF 안에 IF가 들어간다. 이게 시작이다. 스킬 쿨타임을 추가한다. 적의 패턴을 추가한다. 광폭화를 추가한다. IF문이 5단 중첩된다. 수식 바를 보면 눈이 아프다. =IF(AND(턴수>3, 스킬쿨=0), IF(적HP<최대HP*0.3, IF(버프중, 스킬데미지*1.2*1.5*2, 스킬데미지*1.5*2), IF(버프중, 스킬데미지*1.2, 스킬데미지)), IF(버프중, IF(치명타율>RAND(), 기본데미지*1.2*1.5, 기본데미지*1.2), IF(치명타율>RAND(), 기본데미지*1.5, 기본데미지)))이게 1턴 데미지 계산이다. 전투는 10턴이다. 이 수식이 10개 반복된다. 시트가 느려진다. F9를 누르면 3초 걸린다. 재계산하는 거다. 컴퓨터가 버벅인다. RAM이 8GB다. 부족하다. 그래도 작동한다. 캐릭터 A가 적 B를 7턴 만에 잡는다. 예상과 같다. 밸런스가 맞다.시뮬 돌려볼게요 회의 시간이다. PD가 말한다. "신규 보스 난이도 어때요?" "시뮬 돌려볼게요." 입버릇이다. 일주일에 50번은 말한다. 시뮬레이터를 켠다. 신규 보스 스탯을 입력한다. HP 500000, 공격력 1200, 방어력 800. 패턴은 3개다. 광역기, 단일기, 버프 해제. 평균 유저 캐릭터를 넣는다. 레벨 60, 공격력 800, 방어력 400. 장비는 평균 등급. 스킬은 표준 빌드. F9를 누른다. 재계산된다. 결과가 나온다. 12턴 만에 보스를 잡는다. PD가 묻는다. "적당해요?" "애매합니다. 10턴이 목표였거든요." "그럼 보스 HP를 줄일까요?" "안 됩니다. HP를 줄이면 고인물 유저가 3턴 만에 잡습니다." 고인물 시뮬도 있다. 레벨 80, 최상급 장비, 최적 빌드. 이 유저들은 6턴 만에 보스를 잡는다. HP를 20% 줄이면 4턴이 된다. 너무 쉽다. "그럼 보스 공격력을 올릴까요?" "그것도 애매합니다. 공격력을 올리면 평균 유저가 14턴에 죽습니다." 체력이 0이 되는 턴이다. 시뮬레이터가 계산해준다. 공격력 1200에서 1400으로 올리면 평균 유저는 12턴째에 죽는다. 보스를 못 잡는다. "그럼 어떻게 하죠?" "보스 패턴을 바꿔야 합니다. 광역기 데미지는 줄이고 빈도를 늘리는 거죠. 평균 유저는 비슷하고 고인물 유저는 조금 더 어려워집니다." 시뮬을 다시 돌린다. 광역기 데미지를 30% 줄인다. 3턴마다 쓰던 걸 2턴마다 쓰게 한다. 계산한다.평균 유저: 11턴 클리어 고인물 유저: 5턴 클리어"이 정도면 괜찮습니다." PD가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요, 이걸로 가죠." 30분 회의가 끝난다. 시뮬이 없었으면 2시간 걸렸다. 숫자 하나가 게임을 바꾼다 런칭 1주일 전이었다. QA에서 연락이 왔다. "10스테이지가 너무 어렵습니다. 못 깨겠어요." 황당했다. 시뮬에서는 문제없었다. 평균 9턴 클리어. 적당한 난이도였다. 빌드를 받아서 직접 해봤다. 진짜 어렵다. 15턴이 지나도 보스가 안 죽는다. 내가 죽는다. 뭐가 문제지. 시뮬레이터를 다시 봤다. 수치를 확인했다. 틀린 게 없다. 보스 HP 300000, 공격력 900, 방어력 600. 맞다. 게임 데이터를 열었다. JSON 파일이다. 보스 스탯을 확인했다. "boss_10": { "hp": 300000, "attack": 900, "defense": 6000 }방어력이 6000이다. 오타였다. 600이어야 하는데 0을 하나 더 붙였다. 누가 했는지 모른다. 아마 나다. 방어력 6000이면 유저 공격이 안 들어간다. 데미지 계산식이 이렇다. 최종데미지 = 기본데미지 * (1000 / (1000 + 적방어력))방어력 600이면 데미지가 62%다. 방어력 6000이면 14%다. 4배 차이다. 시뮬레이터를 고쳤다. 방어력 6000을 입력했다. F9를 눌렀다. 클리어 불가. 33턴째 유저 사망. 맞다. 못 깬다. 프로그래머한테 연락했다. "10스테이지 보스 방어력 600으로 수정해주세요." 급하게 패치했다. 다음 날 빌드에 반영됐다. 숫자 하나가 게임을 망칠 뻔했다. 0 하나 때문에. 엑셀은 거짓말을 안 한다 점심시간이다. 후배가 묻는다. "선배, 밸런스 어떻게 잡아요?" "시뮬 돌려." "시뮬이 정확해요?" "게임보다 정확해." 농담 아니다. 게임은 버그가 있다. 데미지가 안 들어갈 때가 있다. 스킬이 안 나갈 때가 있다. 엑셀은 그런 거 없다. 입력한 대로 계산한다. 물론 한계는 있다. 유저의 컨트롤은 못 본다. 회피 타이밍, 스킬 사용 순서, 포지셔닝. 이건 변수가 너무 많다. 그래서 시뮬은 "평균"을 본다. 평균 유저가 평균 장비로 평균 컨트롤을 했을 때. 이게 기준이다. 고인물은 따로 본다. 최상급 장비, 최적 빌드, 완벽한 컨트롤. 이게 상한선이다. 하한선도 본다. 최저 장비, 엉망 빌드, 못하는 컨트롤. 이 유저도 클리어할 수 있어야 한다. 어렵게라도. 세 가지 케이스를 다 시뮬로 돌린다. 평균 10턴, 상한선 5턴, 하한선 20턴. 이 범위 안에 들어오면 밸런스가 맞다. 범위 밖이면 수정한다. 보스 HP를 조정한다. 공격력을 바꾼다. 패턴을 수정한다. 다시 시뮬을 돌린다. 범위 안에 들어올 때까지. 이게 밸런스 기획이다. 노가다다. 엑셀 노가다. 유저는 엑셀을 모른다 게임이 출시됐다. 커뮤니티를 봤다. "20스테이지 밸런스 개똥이네요. 못 깨겠어요." 받았다. 시뮬을 켰다. 20스테이지 보스를 넣었다. 평균 유저 캐릭터를 넣었다. 돌렸다. 12턴 클리어. "못 깰 리가 없는데." 영상을 찾아봤다. 유저가 올린 플레이 영상. 봤다. 캐릭터 레벨이 50이다. 평균은 60이다. 장비가 2등급 낮다. 스킬 빌드가 엉망이다. 방어 스킬을 안 쓴다. 광역기를 정면으로 맞는다. 이러면 못 깬다. 당연하다. 댓글을 달까 고민했다. "장비를 올리세요. 레벨을 올리세요. 스킬을 잘 쓰세요." 안 달았다. 댓글 창이 지옥일 게 뻔하다. 대신 데이터를 봤다. 20스테이지 클리어율. 68%다. 나쁘지 않다. 30% 유저는 못 깬다. 어려운 편이다. 평균 시도 횟수. 3.2회. 세 번 정도 도전하면 깬다. 적당하다. "밸런스는 맞는데." 유저는 엑셀을 모른다. 시뮬을 모른다. 내가 72시간 동안 IF문을 짜면서 만든 밸런스를 모른다. 그냥 "어렵다"고 말한다. "밸런스 똥겜"이라고 말한다. 괜찮다. 데이터가 말해준다. 68% 클리어율. 이게 진실이다. 엑셀 시뮬의 한계 시뮬이 완벽하진 않다. 작년에 신규 캐릭터를 냈다. 스킬이 특이했다. "적 HP 비율만큼 데미지 증가". HP가 100%면 데미지 2배, 50%면 1.5배, 10%면 1.1배. 시뮬을 짰다. 복잡했다. 턴마다 적 HP를 확인하고 데미지를 계산한다. =기본데미지 * (1 + 적HP/최대HP)돌렸다. 평균 8턴 클리어. 괜찮다. 다른 캐릭터랑 비슷하다. 출시했다. 망했다. 이 캐릭터가 너무 강했다. 고인물 유저들이 모든 컨텐츠를 쓸어버렸다. 3턴 클리어, 2턴 클리어. 시뮬에서는 5턴이었는데. 뭐가 문제였을까. 스킬 연계를 고려 못 했다. 이 캐릭터는 다른 캐릭터랑 조합하면 더 강해진다. A 캐릭터가 적 HP를 99%로 만든다. 그 상태에서 신규 캐릭터가 스킬을 쓴다. 데미지가 2배 가까이 나온다. 시뮬은 단일 전투만 본다. 파티 조합은 안 본다. 변수가 너무 많아서. 캐릭터가 200개다. 조합은 200 * 199 * 198 * 197. 계산 불가능하다. 결국 긴급 패치했다. "적 HP 비율만큼 데미지 증가, 최대 50%". 상한선을 뒀다. 유저들이 욕했다. "너프 먹였다"고. 맞다. 너프 먹였다. 시뮬의 한계다. 모든 걸 볼 순 없다. 그래도 엑셀이다 6시다. 퇴근까지 2시간 남았다. 내일 회의 자료를 만든다. 신규 던전 밸런스 기획서. 40페이지 PPT. 근거는 다 시뮬이다.1스테이지: 평균 5턴 클리어 (시뮬 결과 첨부) 2스테이지: 평균 7턴 클리어 (시뮬 결과 첨부) 보스 스테이지: 평균 12턴 클리어 (시뮬 결과 첨부)PD가 물으면 대답할 수 있다. "시뮬 돌려봤습니다." 숫자가 있다. 근거가 있다. 엑셀이 없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감으로? "이 정도면 적당할 것 같은데요?" 안 된다. 게임은 감으로 만드는 게 아니다. 물론 재미는 감이다. 숫자로 재미를 만들 순 없다. 하지만 밸런스는 숫자다. 숫자로 만든다. VLOOKUP으로 데이터를 불러온다. IF문으로 전투를 계산한다. RAND()로 확률을 구현한다. 이게 내 무기다. 프로그래머는 코드를 짠다. 아티스트는 그림을 그린다. 나는 엑셀을 친다. 손목이 아프다. 마우스를 너무 많이 썼다. 내일은 트랙볼을 사야겠다. F9를 누른다. 시뮬이 돌아간다. 3초 기다린다. 결과가 나온다. 평균 11턴 클리어. 괜찮다. 목표는 10~12턴이었다. 밸런스 맞다. 저장한다. Ctrl+S. 15.2MB 파일이 저장된다. 3년 된 파일이다. 시트 47개. IF문 수천 개. VLOOKUP 수만 개. 이게 내 인생이다.엑셀 함수만으로도 게임은 만들어진다. 아니, 밸런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