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은 사랑인데 회사가 문제다: 덕업일치의 함정
- 07 Dec, 2025
덕업일치라고 믿었던 그때

대학교 3학년 때였다. 게임 동아리에서 밤새 게임하다가 문득 생각했다. “이거 직업으로 하면 되겠네.”
주변 사람들은 다 말렸다. 부모님은 “게임이 무슨 직업이냐”며 공무원 시험을 권했다. 교수님은 “안정적인 대기업 가라”고 했다.
근데 나는 확신했다. 게임 기획자가 되면 하루 종일 게임 하면서 돈 버는 거라고. 좋아하는 걸로 밥 먹고사는 게 덕업일치라고.
지금 생각하면 웃긴다.
취업 준비 1년. 포트폴리오 20개 넘게 만들었다. 게임 플레이 분석, 시스템 기획서, 밸런스 시트. 밤새 작업한 거 면접에서 10분 만에 까였다. “이건 현실성이 없어요.”
그래도 포기 안 했다. 게임은 사랑이니까.
입사했을 때 기뻤다. 드디어 꿈을 이뤘다고 생각했다. 신입 연봉 3200만원. 적지만 괜찮았다. 좋아하는 일 하는데 돈이 문제냐.
첫날 출근. 선배가 말했다. “게임 좋아해서 왔구나. 6개월 뒤에 얘기해보자.”
그때는 무슨 소린지 몰랐다.
숫자가 재미를 이긴 날

3개월 차. 첫 프로젝트 킥오프 미팅이었다.
PD가 들어왔다. “이번 게임 목표 매출 200억입니다.” 재미 얘기는 없었다. 매출 얘기만 2시간 했다.
과금 구조 먼저 짰다. 게임 시스템보다 결제 창이 먼저였다. 확률형 아이템 뽑기, 성장 구간별 과금 유도 포인트, 일일 미션 보상 설계.
내가 만들고 싶었던 건 이게 아니었다.
“이 캐릭터 밸런스 너무 약한데요. 버프 좀 줘야죠.” 내가 말했다. 개발자도 동의했다. 재미를 위해선 당연한 조정이었다.
PD가 말했다. “이 캐릭터 과금 캐릭터예요. 약하면 안 팔려요. 유저가 강한 거 사게 놔둬요.”
그날 처음 알았다. 밸런스 조정이 재미를 위한 게 아니라 매출을 위한 거란 걸.
엑셀 시트 열었다. 무과금 유저 성장 곡선, 소과금 유저 성장 곡선, 고과금 유저 성장 곡선. 세 그래프가 절묘하게 벌어지게 만들어야 했다.
무과금은 느려도 되고. 소과금은 적당히 빠르고. 고과금은 압도적으로.
“이거 Pay to Win 아닌가요?” 내가 물었다.
“그게 비즈니스 모델이에요.” 선배가 대답했다.
유저 입장에선 똥겜이다. 기획자 입장에선 회사 지시다.
런칭 전날의 허무함
밤 11시. 사무실에 불 켜진 곳은 우리 팀뿐이었다.
런칭 D-1. 마지막 밸런스 조정 중이었다. 근데 우리가 조정한 게 아니었다. 운영팀 요청으로 과금 수치를 또 올렸다.
“첫 주 매출이 중요해요. 초반 아이템 가격 20% 더 올려주세요.”
프로그래머가 한숨 쉬었다. “이러면 유저들 욕하는데.” PD가 말했다. “첫 주만 넘기면 돼요. 나중에 이벤트로 돌려주면 되죠.”
나는 말이 안 나왔다.
새벽 2시. 최종 빌드 확인했다. 내가 6개월 동안 만든 게임이었다. 재밌었다. 시스템은 탄탄했다. 밸런스도 나름 괜찮았다.
근데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과금 압박이 너무 강했다. 10레벨까지 가려면 돈 쓰거나 2주 걸렸다. 경쟁 시스템은 과금 유저 잔치였다. 무과금은 구경만 하라는 설계.
동아리에서 밤새 했던 게임들이 떠올랐다. 그때는 재미있어서 했다. 돈 안 써도 됐다. 실력으로 이겼다.
지금 내가 만든 건 뭔가.
아티스트가 말했다. “우리 게임 너 할 거야?” 나는 대답 못 했다. 안 할 것 같았다. 내가 만들었는데.
유저 반응이 칼이 되는 순간

런칭 당일. 오전 10시.
앱스토어 리뷰 새로고침 했다. 5분마다 댓글이 달렸다. “과금 압박 심하네”, “무과금은 하지 마세요”, “밸런스 개판”.
가슴이 아팠다. 내 이름이 나온 건 아닌데 내 얘기 같았다. 내가 설계한 수치였으니까.
커뮤니티는 더 심했다. “기획자 머리에 뭐 들었나”, “이걸 테스트도 안 하고 냈나”, “매출만 생각하네”.
맞는 말이었다. 실제로 매출만 생각했으니까.
오후 3시. 긴급 회의 소집됐다. 운영팀장이 말했다. “유저 반응 안 좋아요. 근데 매출은 목표치 90% 달성 중입니다.”
PD가 웃었다. “그럼 됐네요. 리뷰는 이벤트로 달래고.”
기획팀장이 나를 봤다. “밸런스팀은 유저 달래는 이벤트 기획해줘요. 오늘 중으로.”
내가 만든 문제를 내가 땜질하는 구조였다.
밤 10시. 이벤트 기획서 작성 중이었다. “무료 아이템 지급”, “성장 구간 완화”, “과금 아이템 할인”.
땜질이었다. 근본적 해결이 아니었다. 어차피 다음 업데이트 때 또 과금 압박 강화할 거였다.
선배가 말했다. “적응해. 이게 현실이야.” 나는 대답 안 했다.
적응하고 싶지 않았다.
회의실에서 죽는 기획
“이번 신규 콘텐츠는 레이드 던전입니다.” 내가 발표했다.
기획서 40페이지. 2주 걸렸다. 협력 시스템, 역할 분담, 패턴 설계. 재미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PD가 물었다. “과금 포인트는?” 나는 대답했다. “실력으로 클리어 가능하게 만들었어요.”
회의실 분위기가 싸해졌다.
“다시 만들어와요. 과금 유저 전용 콘텐츠로.” PD가 말했다. “무과금은 입장 티켓부터 막아요. 재화 소모 크게 하고.”
내가 물었다. “그럼 유저 절반은 못 하는데요.” PD가 대답했다. “그 절반이 매출 기여 0%예요.”
기획서가 쓰레기통에 들어갔다. 2주가 날아갔다.
다시 만들었다. 입장 티켓 과금제, 보상 확률형, 강화 재료 판매. 재미는 빠지고 수익 모델만 남았다.
통과됐다. “이제 그럴듯하네요.” PD가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개발자가 복도에서 말했다. “너도 힘들지?” 힘들었다. “처음엔 다 그래. 나도 게임 좋아서 왔거든.”
그는 이제 게임 안 한다고 했다. 퇴근하면 영화 본다고. 게임은 질렸다고.
나도 그렇게 되는 건가.
덕업일치의 진실
1년 차 끝날 무렵. 친구를 만났다.
“게임 회사 어때?” 친구가 물었다. “재밌어?” 나는 웃었다. “응. 재밌어.”
거짓말이었다.
집에 와서 게임을 켰다. 다른 회사 게임이었다. 재밌었다. 2시간 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이 밸런스는 이렇게 짰구나.’ ‘이 과금 구조는 저렇게 유도하네.’ ‘이건 매출 목표가 얼마였을까.’
게임을 게임으로 못 보고 있었다. 전부 수치로 보였다. 기획 의도가 보였다. 비즈니스 모델이 보였다.
재미가 사라졌다.
예전엔 게임이 좋았다. 스토리에 몰입했고 전투가 짜릿했다. 레벨업이 기뻤고 아이템 획득이 즐거웠다.
지금은 다 계산이다. ‘이 구간 성장 속도 0.8배네.’ ‘확률 테이블 너무 짜네.’ ‘과금 압박 타이밍 여기서 주네.’
직업병이었다. 고칠 수 없었다.
게임을 사랑했다. 지금도 사랑한다. 근데 게임 회사는 싫다. 이게 모순이라는 걸 안다.
덕업일치. 좋아하는 걸 직업으로 삼으면 행복할 줄 알았다.
틀렸다.
좋아하는 걸 직업으로 삼으면 더 이상 좋아할 수 없게 된다.
그래도 퇴사는 못 한다
5년 차다. 연봉은 올랐다. 5200만원.
게임은 여전히 좋다. 근데 게임 회사는 여전히 싫다.
매일 아침 출근한다. 유저 피드백 확인한다. “밸런스 똥겜.” 맞는 말이다. 내가 만들었으니까.
근데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팀 전체가, 회사 전체가 매출을 본다. 재미는 부차적이다. 유저 만족도는 지표일 뿐이다.
가끔 생각한다. 인디 게임 만들까. 매출 신경 안 쓰고 재미만 추구하는 게임.
근데 현실이 있다. 월세가 있고 생활비가 있다. 5200만원 버리고 월급 없이 못 산다.
동아리 후배가 연락 왔다. “형 회사 들어가고 싶어요.” 나는 말했다. “다른 데 알아봐.” “왜요? 형은 덕업일치 하잖아요.”
덕업일치. 웃긴다.
“응. 그래. 덕업일치야.” 나는 거짓말했다.
오늘도 출근한다. 엑셀 연다. 밸런스 시트 수정한다. 과금 수치 조정한다. 유저는 욕한다. 회사는 매출 본다.
게임은 여전히 사랑한다. 퇴근하면 다른 게임 한다. 직업병으로 뜯어보면서.
회사가 문제다. 산업이 문제다. 구조가 문제다.
근데 나는 못 나간다.
이게 덕업일치의 함정이다.
덕업일치는 환상이다. 좋아하는 걸 직업으로 삼는 순간 좋아할 수 없게 된다. 그래도 나는 오늘도 출근한다. 이게 현실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