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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은
- 26 Dec, 2025
팀원끼리 '이 게임은 정말 재미있을까?'라는 의심
회의실에서 나온 질문 회의실을 나왔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거 정말 재미있나?" 3개월째 만들고 있는 게임이다. 시스템 기획서는 완성됐다. 전투 밸런스도 7번 조정했다. 코어 루프는 명확하다. 그런데 매일 테스트하는 우리는 재미를 못 느낀다. 프로그래머 민수가 먼저 물어봤다. "형, 솔직히 이거 재미있어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기획서에는 재미있다고 썼다. 근거도 있다. 경쟁작 분석도 했다. 유저 페르소나도 만들었다. 그런데 직접 플레이하면 재미가 안 느껴진다.테스트 빌드를 열었다. 튜토리얼부터 해봤다. 10분 플레이했다. 껐다. 뭔가 이상하다. 시스템은 돌아간다. 버그도 없다. 근데 재미가 없다. "우리가 너무 많이 해봐서 그런가?" 아티스트 지영이 말했다. "유저는 처음 할 텐데 괜찮을 거야." 그 말이 위로가 됐다. 1시간 정도. 저녁에 다시 플레이했다. 역시 재미없다. 3개월 동안 같은 컨텐츠만 반복했다. 밸런스 체크하려고 같은 스테이지를 500번은 깬 것 같다. 이제 눈 감고도 클리어할 수 있다. 그래서 재미가 없는 건가. 아니면 게임 자체가 재미없는 건가. 엑셀 시트가 말해주지 않는 것 숫자는 괜찮았다. 유저 1명이 하루에 접속하는 시간: 45분 예상. 첫 과금까지 걸리는 시간: 3일. 이탈률: 30% 예상. 경쟁작보다 낮다. 스프레드시트에는 다 있다. 레벨별 경험치 커브. 재화 획득량. 가챠 확률. 던전 난이도. 보상 밸런스. 모든 수치가 시뮬레이션 통과했다. 그런데 재미는 시뮬레이션할 수 없다.PD가 물어봤다. "기획 의도대로 구현됐어?" "네." "밸런스는 문제없어?" "없습니다." "그럼 됐어. 유저 반응 보면 알아." 유저 반응 보면 안다. 그 말이 제일 무섭다. 베타 테스트 전까지 3주 남았다. 3주 동안 우리는 이 게임이 재미있는지 모른 채 만든다. 나는 매일 밸런스 시트를 본다. 숫자를 조정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 숫자가 재미를 만들어줄까?" 경험치를 10% 올리면 재미있어질까. 보상을 20% 늘리면. 던전을 더 어렵게 하면. 더 쉽게 하면. 가챠 확률을 올리면. 엑셀은 대답하지 않는다. 다른 팀 이야기 복도에서 옆 팀 기획자를 만났다. 그 팀도 막바지다. "너희 게임은 재미있어?" 내가 물었다. "모르겠어. 우린 매일 해서." 같은 고민이었다. 그 팀은 작년에 게임을 출시했다. 첫 주 매출 예상: 3억. 실제 매출: 8천만원. 두 달 만에 서비스 종료했다. "개발할 때는 다들 확신했어. 재미있을 거라고." 그 말이 머릿속에 남았다. 회사 옆에 있는 편의점에 갔다. 컵라면을 끓였다. 편의점 의자에 앉아서 먹었다. 옆에서 고등학생 둘이 게임하고 있었다. 모바일 RPG다. 우리 경쟁작이다. "이거 개꿀잼이야." "인정. 밸런스 지린다." 나는 그 게임을 분석했다. 엑셀 시트에 다 정리했다. 시스템 구조도 이해한다. 밸런스 테이블도 역설계했다. 그런데 직접 플레이하면 재미가 없다. 왜냐면 나는 분석하면서 플레이하니까.고등학생들은 분석하지 않는다. 그냥 즐긴다. 숫자를 보지 않는다. 밸런스를 생각하지 않는다. 경험치 커브가 어떻든 상관없다. 재미있으면 한다. 편의점을 나왔다. 회사로 돌아갔다. 테스트 빌드를 켰다. 10분 플레이했다. 여전히 재미없다. 유저는 다를까. 베타 테스트 2주 전 팀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다들 말을 아낀다. 회의 시간이 줄었다. 각자 작업만 한다. 테스트는 안 한다. 왜냐면 테스트할 때마다 불안해지니까. 민수가 말했다. "형, 우리 게임 망하면 어떡해?" "데이터 보고 빠르게 수정하지 뭐." "근데 근본적으로 재미없으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근본적으로 재미없는 게임은 고칠 수 없다. 밸런스로 커버 안 된다. 시스템을 갈아엎어야 한다. 그럴 시간은 없다. 베타 테스트 일정은 확정됐다. 마케팅 예산도 잡혔다. 사전예약 이벤트도 기획됐다. 이제 멈출 수 없다. 불안한 채로 가는 수밖에. PD가 전체 회의를 열었다. "우리 게임 재미있습니다. 확신 가지세요. 유저 반응 좋을 겁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PD도 확신이 없어 보였다. 그날 밤 집에서 경쟁작을 했다. 3시간 플레이했다. 재미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우리 게임은 이거보다 재미있나?" 모르겠다. 베타 오픈 당일 새벽 4시에 일어났다. 잠이 안 왔다. 베타 테스트는 오전 11시 시작이다. 7시간 남았다. 회사에 일찍 갔다. 아무도 없다. 테스트 서버를 확인했다. 빌드 체크했다. 데이터 동기화 확인했다. 이상 없다. 9시에 팀원들이 출근했다. 다들 피곤해 보인다. 어제 밤 늦게까지 최종 점검했다. 이제 할 수 있는 건 없다. 11시. 서버 오픈했다. 유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실시간 모니터링 화면을 켰다. 동접자 수가 올라간다. 50명. 100명. 500명.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다들 모니터만 본다. 첫 던전 클리어율을 봤다. 85%. 예상은 80%. 괜찮다. 튜토리얼 이탈률. 12%. 예상은 15%. 좋다. 평균 플레이 타임. 35분. 예상은 45분. 좀 짧다. 숫자는 괜찮다. 그런데 재미는. 민수가 유저 채팅을 띄웠다. 커뮤니티 반응을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그래픽 괜찮은데?" "시스템은 좀 복잡하네." "이거 뭐하는 게임이야?" "재미는 있는데 뭔가 아쉬워." 재미는 있는데 뭔가 아쉽다. 그 코멘트가 제일 무서웠다. 베타 테스트 3일차 데이터가 쌓였다. 숫자는 예상보다 좋았다. 평균 플레이 타임: 42분. 재접속률: 68%. 첫 과금 전환율: 4.2%. 경쟁작보다 높다. 그런데 유저 반응은 애매했다. "잘 만들긴 했는데 뭔가 빠진 느낌." "시스템은 탄탄한데 재미는 보통." "할 만은 한데 계속 할지는 모르겠음." 지영이 물었다. "이거 긍정이야 부정이야?" "애매한 거지." "그럼 망한 거야?" "아니 그 정도는 아니고." 망한 건 아니다. 그런데 대박도 아니다. 그냥 그런 게임. 숫자는 괜찮은데 뭔가 부족한 게임. PD가 말했다. "출시 전에 재미 더 끌어올립시다." 어떻게? "밸런스 조정하고, 컨텐츠 추가하고." 그게 재미를 만들까? 나는 밸런스 시트를 열었다. 어디를 만져야 할까. 경험치? 보상? 난이도? 스킬? 가챠? 숫자를 바꾸면 재미가 생길까. 피드백을 뜯어보는 시간 베타 테스터 인터뷰를 했다. 10명. 각자 30분씩. 게임에 대해 물어봤다. "재미있었어요?" "응 그냥 그런 거 같은데." "어떤 부분이 아쉬웠어요?" "음... 뭐랄까, 다 괜찮은데 확 끌리지는 않아요." 확 끌리지 않는다. 다른 테스터에게도 물었다. "이 게임 친구한테 추천할 거예요?" "글쎄요. 할 만하긴 한데 꼭 추천할 정도는." "왜요?" "그냥요. 특별한 게 없어요." 특별한 게 없다. 인터뷰를 정리했다. 공통 피드백:시스템은 잘 만들어짐 그래픽 괜찮음 밸런스 무난함 그런데 특별하지 않음 기억에 남는 순간이 없음 다시 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듦우리는 잘 만들었다. 그런데 특별하지 않다. 기획서를 다시 봤다. 코어 컨셉: 전략적 덱 빌딩 RPG. 타겟: 20-30대 남성. 레퍼런스: A게임 + B게임. 차별점: C 시스템. 차별점이 약했다. 레퍼런스 게임들의 조합일 뿐이다. 새로운 경험은 없다. 우리는 안전하게 만들었다. 검증된 시스템. 검증된 밸런스. 검증된 재미. 그래서 망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뜨지도 않는다. 민수가 물었다. "형, 이거 어떻게 고쳐?" "모르겠어." "정말?" "응. 근본을 바꿔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 출시는 2개월 뒤다. 불안을 견디는 방법 결국 우리는 출시하기로 했다. 베타 피드백 반영해서. 밸런스 조정하고. 컨텐츠 추가하고. UI 개선하고. 근본은 안 바뀐다. 특별해지지 않는다. 그냥 괜찮은 게임으로 출시한다. 그게 현실이다. 회사 옥상에 올라갔다. 담배 피우는 곳이다. 나는 안 피우지만 가끔 올라온다. 민수가 와 있었다. "형도 왔네." "응." 한강이 보였다. 늦은 밤이라 조용하다. 민수가 말했다. "우리 게임 망하면 어떡하지." "망하진 않을 거야." "대박도 아니잖아." "응." 침묵이 흘렀다. "형, 게임 기획 계속할 거야?" "모르겠어. 너는?" "나도 모르겠어." 우리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래도 만들긴 하잖아." 민수가 말했다. "응." "재미있는지 모르는 게임을." "그래도 만들어." 그게 답이다. 재미있는지 확신할 수 없어도 만든다. 불안한 채로 만든다. 출시한다. 유저 반응 본다. 데이터 분석한다. 업데이트한다. 그리고 다음 게임을 만든다. 또 불안한 채로. 옥상을 내려왔다. 자리로 돌아왔다. 밸런스 시트를 열었다. 경험치 커브를 수정했다. 던전 보상을 조정했다. 스킬 데미지를 올렸다. 이게 재미를 만들까. 모르겠다. 그래도 한다. 출시 한 달 전 팀 분위기가 조금 나아졌다. 베타 데이터가 나쁘지 않아서. 망하지는 않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대박은 아니어도 괜찮다. 흥행은 아니어도 괜찮다. 서비스는 유지된다. 다음 업데이트를 준비한다. 그게 우리 일이다. PD가 회의에서 말했다. "출시 후 3개월 로드맵 짭시다. 유저 이탈 막으려면 신규 컨텐츠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미 다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출시도 안 했는데. 집에 가는 길. 지하철에서 게임했다. 우리 베타 빌드가 아니라 다른 게임. 신작 RPG다. 평점 4.5. 다운로드 50만. 30분 플레이했다. 재미있었다. 시스템은 단순하다. 밸런스는 평범하다. 그래픽도 특별하지 않다. 그런데 뭔가 있다. 확 끄는 순간이 있다. 다시 하고 싶게 만드는 재미가 있다. 이게 뭐지. 우리 게임과 뭐가 다르지. 숫자로 설명할 수 없다. 기획서에 쓸 수 없다. 엑셀 시트에 넣을 수 없다. 그냥 재미다. 그래도 만든다 오늘도 출근했다. 오늘도 밸런스 시트를 연다. 오늘도 숫자를 만진다. 출시까지 4주 남았다. 우리 게임이 재미있을까. 여전히 모르겠다. 유저가 좋아할까. 확신 없다. 대박 칠까. 아니. 그래도 만든다. 출시한다. 데이터 본다. 업데이트한다. 이게 게임 기획자의 일이다. 불안을 견디는 게 일이다. 확신 없이 만드는 게 일이다. 재미는 출시 후에 알게 된다. 유저 반응으로. 숫자로. 리뷰로. 매출로. 그 전까지는 모른다. 그냥 믿는다. 우리가 잘 만들었다고. 괜찮을 거라고. 밸런스 시트를 저장했다. 슬랙에 업데이트를 공유했다. 민수가 확인 이모지를 달았다. 오늘도 하루가 지나간다. 출시는 가까워진다. 불안도 커진다. 그래도 만든다.재미는 숫자가 아니라 순간이다. 그 순간은 출시 후에야 알게 된다.
- 07 Dec, 2025
게임은 사랑인데 회사가 문제다: 덕업일치의 함정
덕업일치라고 믿었던 그때대학교 3학년 때였다. 게임 동아리에서 밤새 게임하다가 문득 생각했다. "이거 직업으로 하면 되겠네." 주변 사람들은 다 말렸다. 부모님은 "게임이 무슨 직업이냐"며 공무원 시험을 권했다. 교수님은 "안정적인 대기업 가라"고 했다. 근데 나는 확신했다. 게임 기획자가 되면 하루 종일 게임 하면서 돈 버는 거라고. 좋아하는 걸로 밥 먹고사는 게 덕업일치라고. 지금 생각하면 웃긴다. 취업 준비 1년. 포트폴리오 20개 넘게 만들었다. 게임 플레이 분석, 시스템 기획서, 밸런스 시트. 밤새 작업한 거 면접에서 10분 만에 까였다. "이건 현실성이 없어요." 그래도 포기 안 했다. 게임은 사랑이니까. 입사했을 때 기뻤다. 드디어 꿈을 이뤘다고 생각했다. 신입 연봉 3200만원. 적지만 괜찮았다. 좋아하는 일 하는데 돈이 문제냐. 첫날 출근. 선배가 말했다. "게임 좋아해서 왔구나. 6개월 뒤에 얘기해보자." 그때는 무슨 소린지 몰랐다. 숫자가 재미를 이긴 날3개월 차. 첫 프로젝트 킥오프 미팅이었다. PD가 들어왔다. "이번 게임 목표 매출 200억입니다." 재미 얘기는 없었다. 매출 얘기만 2시간 했다. 과금 구조 먼저 짰다. 게임 시스템보다 결제 창이 먼저였다. 확률형 아이템 뽑기, 성장 구간별 과금 유도 포인트, 일일 미션 보상 설계. 내가 만들고 싶었던 건 이게 아니었다. "이 캐릭터 밸런스 너무 약한데요. 버프 좀 줘야죠." 내가 말했다. 개발자도 동의했다. 재미를 위해선 당연한 조정이었다. PD가 말했다. "이 캐릭터 과금 캐릭터예요. 약하면 안 팔려요. 유저가 강한 거 사게 놔둬요." 그날 처음 알았다. 밸런스 조정이 재미를 위한 게 아니라 매출을 위한 거란 걸. 엑셀 시트 열었다. 무과금 유저 성장 곡선, 소과금 유저 성장 곡선, 고과금 유저 성장 곡선. 세 그래프가 절묘하게 벌어지게 만들어야 했다. 무과금은 느려도 되고. 소과금은 적당히 빠르고. 고과금은 압도적으로. "이거 Pay to Win 아닌가요?" 내가 물었다. "그게 비즈니스 모델이에요." 선배가 대답했다. 유저 입장에선 똥겜이다. 기획자 입장에선 회사 지시다. 런칭 전날의 허무함 밤 11시. 사무실에 불 켜진 곳은 우리 팀뿐이었다. 런칭 D-1. 마지막 밸런스 조정 중이었다. 근데 우리가 조정한 게 아니었다. 운영팀 요청으로 과금 수치를 또 올렸다. "첫 주 매출이 중요해요. 초반 아이템 가격 20% 더 올려주세요." 프로그래머가 한숨 쉬었다. "이러면 유저들 욕하는데." PD가 말했다. "첫 주만 넘기면 돼요. 나중에 이벤트로 돌려주면 되죠." 나는 말이 안 나왔다. 새벽 2시. 최종 빌드 확인했다. 내가 6개월 동안 만든 게임이었다. 재밌었다. 시스템은 탄탄했다. 밸런스도 나름 괜찮았다. 근데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과금 압박이 너무 강했다. 10레벨까지 가려면 돈 쓰거나 2주 걸렸다. 경쟁 시스템은 과금 유저 잔치였다. 무과금은 구경만 하라는 설계. 동아리에서 밤새 했던 게임들이 떠올랐다. 그때는 재미있어서 했다. 돈 안 써도 됐다. 실력으로 이겼다. 지금 내가 만든 건 뭔가. 아티스트가 말했다. "우리 게임 너 할 거야?" 나는 대답 못 했다. 안 할 것 같았다. 내가 만들었는데. 유저 반응이 칼이 되는 순간런칭 당일. 오전 10시. 앱스토어 리뷰 새로고침 했다. 5분마다 댓글이 달렸다. "과금 압박 심하네", "무과금은 하지 마세요", "밸런스 개판". 가슴이 아팠다. 내 이름이 나온 건 아닌데 내 얘기 같았다. 내가 설계한 수치였으니까. 커뮤니티는 더 심했다. "기획자 머리에 뭐 들었나", "이걸 테스트도 안 하고 냈나", "매출만 생각하네". 맞는 말이었다. 실제로 매출만 생각했으니까. 오후 3시. 긴급 회의 소집됐다. 운영팀장이 말했다. "유저 반응 안 좋아요. 근데 매출은 목표치 90% 달성 중입니다." PD가 웃었다. "그럼 됐네요. 리뷰는 이벤트로 달래고." 기획팀장이 나를 봤다. "밸런스팀은 유저 달래는 이벤트 기획해줘요. 오늘 중으로." 내가 만든 문제를 내가 땜질하는 구조였다. 밤 10시. 이벤트 기획서 작성 중이었다. "무료 아이템 지급", "성장 구간 완화", "과금 아이템 할인". 땜질이었다. 근본적 해결이 아니었다. 어차피 다음 업데이트 때 또 과금 압박 강화할 거였다. 선배가 말했다. "적응해. 이게 현실이야." 나는 대답 안 했다. 적응하고 싶지 않았다. 회의실에서 죽는 기획 "이번 신규 콘텐츠는 레이드 던전입니다." 내가 발표했다. 기획서 40페이지. 2주 걸렸다. 협력 시스템, 역할 분담, 패턴 설계. 재미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PD가 물었다. "과금 포인트는?" 나는 대답했다. "실력으로 클리어 가능하게 만들었어요." 회의실 분위기가 싸해졌다. "다시 만들어와요. 과금 유저 전용 콘텐츠로." PD가 말했다. "무과금은 입장 티켓부터 막아요. 재화 소모 크게 하고." 내가 물었다. "그럼 유저 절반은 못 하는데요." PD가 대답했다. "그 절반이 매출 기여 0%예요." 기획서가 쓰레기통에 들어갔다. 2주가 날아갔다. 다시 만들었다. 입장 티켓 과금제, 보상 확률형, 강화 재료 판매. 재미는 빠지고 수익 모델만 남았다. 통과됐다. "이제 그럴듯하네요." PD가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개발자가 복도에서 말했다. "너도 힘들지?" 힘들었다. "처음엔 다 그래. 나도 게임 좋아서 왔거든." 그는 이제 게임 안 한다고 했다. 퇴근하면 영화 본다고. 게임은 질렸다고. 나도 그렇게 되는 건가. 덕업일치의 진실 1년 차 끝날 무렵. 친구를 만났다. "게임 회사 어때?" 친구가 물었다. "재밌어?" 나는 웃었다. "응. 재밌어." 거짓말이었다. 집에 와서 게임을 켰다. 다른 회사 게임이었다. 재밌었다. 2시간 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이 밸런스는 이렇게 짰구나.' '이 과금 구조는 저렇게 유도하네.' '이건 매출 목표가 얼마였을까.' 게임을 게임으로 못 보고 있었다. 전부 수치로 보였다. 기획 의도가 보였다. 비즈니스 모델이 보였다. 재미가 사라졌다. 예전엔 게임이 좋았다. 스토리에 몰입했고 전투가 짜릿했다. 레벨업이 기뻤고 아이템 획득이 즐거웠다. 지금은 다 계산이다. '이 구간 성장 속도 0.8배네.' '확률 테이블 너무 짜네.' '과금 압박 타이밍 여기서 주네.' 직업병이었다. 고칠 수 없었다. 게임을 사랑했다. 지금도 사랑한다. 근데 게임 회사는 싫다. 이게 모순이라는 걸 안다. 덕업일치. 좋아하는 걸 직업으로 삼으면 행복할 줄 알았다. 틀렸다. 좋아하는 걸 직업으로 삼으면 더 이상 좋아할 수 없게 된다. 그래도 퇴사는 못 한다 5년 차다. 연봉은 올랐다. 5200만원. 게임은 여전히 좋다. 근데 게임 회사는 여전히 싫다. 매일 아침 출근한다. 유저 피드백 확인한다. "밸런스 똥겜." 맞는 말이다. 내가 만들었으니까. 근데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팀 전체가, 회사 전체가 매출을 본다. 재미는 부차적이다. 유저 만족도는 지표일 뿐이다. 가끔 생각한다. 인디 게임 만들까. 매출 신경 안 쓰고 재미만 추구하는 게임. 근데 현실이 있다. 월세가 있고 생활비가 있다. 5200만원 버리고 월급 없이 못 산다. 동아리 후배가 연락 왔다. "형 회사 들어가고 싶어요." 나는 말했다. "다른 데 알아봐." "왜요? 형은 덕업일치 하잖아요." 덕업일치. 웃긴다. "응. 그래. 덕업일치야." 나는 거짓말했다. 오늘도 출근한다. 엑셀 연다. 밸런스 시트 수정한다. 과금 수치 조정한다. 유저는 욕한다. 회사는 매출 본다. 게임은 여전히 사랑한다. 퇴근하면 다른 게임 한다. 직업병으로 뜯어보면서. 회사가 문제다. 산업이 문제다. 구조가 문제다. 근데 나는 못 나간다. 이게 덕업일치의 함정이다.덕업일치는 환상이다. 좋아하는 걸 직업으로 삼는 순간 좋아할 수 없게 된다. 그래도 나는 오늘도 출근한다. 이게 현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