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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
- 05 Dec, 2025
프로그래머와의 첫 구현 회의: 기획의도는 죽는다
프로그래머와의 첫 구현 회의: 기획의도는 죽는다 오전 10시, 희망에 찬 기획서 회의실 예약했다. 10시 30분. 프로그래머 두 명, 나. 어젯밤까지 쓴 기획서 준비됐다. "이번 스킬 시스템은 완벽해." 3주 동안 경쟁작 분석했다. 밸런스 시뮬레이션 100번 돌렸다. 유저 피드백 200개 정리했다. 엑셀 시트 15개. 기획의도는 명확했다. "스킬 조합의 재미." 최대 5개 스킬 동시 발동. 각 스킬마다 시너지 효과. 조합 가능 수 126가지. 프린트한 기획서 두께 1cm. 이거면 된다고 생각했다.10시 31분, 첫 질문 "형, 이거 실시간이에요?" 프로그래머 민수. 경력 7년차, 서버 개발. 항상 핵심을 찌른다. "네, 스킬 발동하면 즉시 판정이요." "동시 발동이 5개요?" "네." "그럼 서버에서 매번 조합 계산해야 되는데." 엑셀 시트 넘겼다. 조합별 시너지 테이블. 126가지 경우의 수. "이거 다 DB 조회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네요." 민수가 계산기 두드렸다. 동시접속 3000명 가정. 초당 스킬 사용 평균 5회. DB 조회 3000 x 5 x 5 = 75,000 쿼리. "서버 죽습니다." 회의 시작 1분 만에. 기획의도 1차 사망. 10시 45분, 대안 찾기 "그럼 캐싱하면 되지 않나요?" 클라이언트 개발 지훈이가 말했다. 경력 3년, 유니티 전문. "조합 테이블 전부 클라에 들고 있으면요." 민수가 고개 저었다. "126가지 조합인데, 스킬이 50개면 몇 개죠?" "계산 안 해봐도... 많죠." 지훈이가 덧붙였다. "그리고 밸런스 패치 때마다 클라 업데이트요?" "앱스토어 심사 2주 기다리고요." 아. 생각 못 했다. "실시간이 아니면 안 돼요?" 민수가 물었다. 기획의도는 '즉각 피드백'이었다. 스킬 누르면 바로 효과. 타격감, 폭발감, 쾌감. "...안 되는데." "그럼 조합 수 줄이셔야 돼요." 126가지에서 얼마로? "20개 정도면." 1/6로 줄이라고.11시 10분, 성능 이슈 20개로 줄였다. 스킬 조합 20가지.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형, 이펙트는요?" 지훈이가 물었다. "스킬마다 고유 이펙트 있고, 조합 시너지 이펙트 추가로요." 기획서 7페이지 펼쳤다. 조합별 이펙트 연출안. 화려하게 터지는 거. "이펙트 20개 동시 재생이요?" "응, 5개 스킬 + 시너지 이펙트들." 지훈이 표정이 어두워졌다. "저사양 폰 죽어요." "요즘 폰 성능 좋잖아요." "타겟 유저 50%는 3년 전 폰 써요." 아. 또 생각 못 했다. "파티클 수 줄이면 되지 않아요?" "줄이면 이펙트가 화려하지 않은데요." 기획의도는 '화려한 연출'이었다. 유튜브 숏츠에 올라갈 만한 거. 바이럴 날 만한 거. "프레임 30 아래로 떨어지면 유저들 난리 나요." 지훈이가 유저 리뷰 캡처 보여줬다. "최적화 똥겜" "갤럭시 S9에서 렉 걸림" "환불해주세요" 기획의도 2차 사망. 11시 40분, API 한계 "서버 부하 줄이려면 턴제로 가는 게." 민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턴제요?" "네, 실시간 말고 턴 기반 전투." 기획서 1페이지. "실시간 액션 RPG" "그럼 장르가 바뀌잖아요." "장르 안 바뀌고는 이 기획 못 살려요."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민수가 계속 설명했다. 현재 서버 아키텍처는 턴제 최적화. 실시간 동기화 구조 없음. 새로 만들려면 2달. 인력 3명 투입. "PD님이 허락 안 하실 텐데요." 일정은 이미 타이트했다. 런칭 4개월 남았다. 새 시스템 개발 시간 없다. "그럼 스킬 발동을 순차적으로 하면요?" 내가 물었다. "그럼 '동시 발동'이 아니잖아요." 기획서 3페이지. "최대 5개 스킬 동시 발동" "순차 발동이랑 동시 발동이랑 재미가 다른데." "형, 재미는 저도 알아요. 근데 못 만들어요." 민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API 한계예요. 지금 구조로는 안 돼요."12시 10분, 타협안 회의 1시간 40분. 점심시간 넘어갔다. 화이트보드 가득 적힌 제약사항들.서버: 동시 처리 불가 클라: 이펙트 최적화 필요 일정: 2달 이상 작업 불가 구조: 턴제 기반"그럼 이렇게 하면 어때요." 내가 화이트보드에 썼다.스킬 조합 10가지로 축소 동시 발동 → 0.5초 간격 순차 발동 이펙트 단순화, 저사양 모드 추가 조합 테이블 클라 캐싱"이 정도면 할 만해요?" 민수랑 지훈이가 고개 끄덕였다. "개발 기간은요?" "3주요." "테스트 포함해서요?" "...4주요." 일정표 다시 짰다. 다른 기능들 미루고. 이거 먼저 넣고. "OK, 그럼 이걸로 PD님한테." 회의 끝. 기획서는 반토막 났다. 15페이지에서 7페이지로. 126가지 조합에서 10가지로. 동시 발동에서 순차 발동으로. 처음 의도한 거랑 완전히 달라졌다. 오후 2시, 기획서 다시 쓰기 자리 돌아와서 엑셀 켰다. 조합 테이블 다시 짰다. 126가지에서 10가지 추리기. 가장 재밌을 거 같은 거. 가장 밸런스 잡힌 거. 3주 작업이 3시간으로. 기획의도는 뭐였나. "스킬 조합의 재미" 10가지도 재밌을까? 126가지만큼? 모르겠다. 만들어봐야 안다. 컨플루언스에 기획서 업데이트. 제목 수정. "스킬 동시 발동 시스템 v2.0 (구현 가능 버전)" 괄호 안 문구가 슬프다. 오후 4시, PD 보고 PD님 자리 찾아갔다. "시스템 기획 수정본이요." "많이 바뀌었네?" "네, 구현 검토하면서요." PD님이 기획서 훑었다. 10초 만에 핵심 파악. "조합 수 왜 줄었어?" "서버 부하 때문에요." "10개로 재미 나올까?" "...최선을 다해볼게요." PD님이 한숨 쉬었다. "우리가 만들고 싶은 거랑 만들 수 있는 거는 다르니까." "네." "유저들이 재밌어하면 그게 맞는 거야." "알겠습니다." 보고 끝. 돌아 나왔다. 복도에서 민수 마주쳤다. "형, PD님 뭐래요?" "오케이래." "다행이네. 근데 형 표정이 왜 그래요." "아니, 괜찮아." 괜찮지 않았다. 오후 6시, 혼자 생각 퇴근 전에 경쟁작 켰다. '킹덤 오브 레전드' 스킬 시스템 봤다. 조합 가능한 게 50가지 넘어 보였다. 실시간으로 터진다. 이펙트 화려하다. 프레임 드랍 없다. "얘네는 어떻게 한 거지?" 개발 기간 2년. 개발비 50억. 개발팀 80명. 우리는 4개월에 15명. 답 나왔다. 창 닫았다. 기획자의 숙명이다. 머릿속 완벽한 기획. 현실에선 반의반. "API 한계" "성능 이슈" "일정 부족" "인력 부족" 이 단어들 앞에서. 기획의도는 맥없이 죽는다. 그래도 만들어야 한다. 10가지 조합이라도. 순차 발동이라도. 단순한 이펙트라도. 유저가 재밌다고 하면. 그게 정답이다. 오후 8시, 퇴근길 회사 나섰다. 편의점 들렀다. 에너지 드링크 샀다. 집 가는 지하철. 핸드폰으로 엑셀 열었다. 10가지 조합 밸런스 체크. 옆자리 사람이 쳐다봤다. "저 사람 왜 지하철에서 엑셀을." 퇴근길에도 일한다. 기획자니까. 다음 정거장 도착 안내방송. 핸드폰 꺼졌다. 배터리 없다. 창밖 봤다. 어둡다. 내일 또 회의 있다. "UI 구현 검토 회의" 또 죽겠지. 기획의도.프로그래머가 "안 돼요"라고 하면, 기획자는 기획서를 다시 쓴다. 이게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