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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에요라고

신입 기획자가 '왜 이 수치에요?'라고 물을 때

신입 기획자가 '왜 이 수치에요?'라고 물을 때

오늘 신입이 물었다 "선배님, 이 공격력 수치는 왜 127이에요?" 엑셀 시트를 보고 있던 내가 손을 멈췄다. 127. 맞다. 내가 넣은 숫자다. 3일 전에. "음... 그게..." 대답이 안 나온다. 5년 차가 신입한테 수치 하나 설명 못하는 게 창피했다. 하지만 진짜로 설명하기 어렵다. 신입 기획자 이준호. 입사 3개월. 성실하다. 질문도 많이 한다. 근데 가끔 이런 질문이 제일 곤란하다. "시뮬 돌려보면서 조정한 거야." "네, 근데 왜 127인가요? 120도 아니고 130도 아니고요." 질문이 정확하다. 나도 궁금하다. 왜 127이었을까.밸런스는 과학이 아니다 게임 기획 5년 하면서 깨달은 거. 밸런싱은 과학이 아니라 요리다. 레시피는 있다. DPS 공식, 성장 곡선 그래프, 유저 플레이타임 분석. 다 있다. 근데 그걸로 게임이 재밌어지지 않는다. 소금 5g이랑 5.3g의 차이. 요리사는 안다. 혀로. 근데 설명은 못한다. 공격력 127. 시뮬 돌렸을 때 DPS가 142.7 나왔다. 목표는 140~145. 범위 안이다. 근데 120으로 하면 131.5. 애매하다. 130으로 하면 149.2. 넘친다. 그래서 127. 142.7. 딱이다. 근데 이걸 신입한테 어떻게 설명하냐. "DPS가 목표 범위 안에 들어가서요." "아, 그럼 128은요?" 128? 시뮬 안 돌려봤다. 돌려보면 비슷할 거다. 0.5 차이 날까. "...큰 차이는 없을 거야." "그럼 왜 127이에요?" 질문이 반복된다. 답은 없다. 진짜 답은 이거다. '그냥 127이 눈에 들어왔다.' 근데 이렇게 말하면 신입이 뭘 배우냐.데이터는 힌트일 뿐 회사에서 밸런싱 교육할 때 가르치는 거.유저 데이터 수집 목표 수치 설정 공식 대입 시뮬레이션 검증 테스트 플레이 반복맞다. 다 맞다. 근데 이게 전부가 아니다. 실제로는 이렇다.유저 데이터 보는데 노이즈 많음 목표 수치는 PD 기분에 따라 바뀜 공식 대입했더니 게임 재미없음 시뮬은 완벽한데 실제론 이상함 테스트 플레이 10번 해도 모름데이터는 거짓말 안 한다. 근데 게임은 숫자가 아니다. 유저의 '체감'이다. 크리티컬 확률 5%. 데이터상으론 적당하다. 100번 치면 5번 터진다. 근데 유저는 "안 터진다"고 난리다. 20번 연속 안 터지면 확률이 고장 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부 로직을 바꾼다. 연속 10번 안 터지면 다음 타격은 무조건 크리티컬. 확률은 5% 그대로지만 체감은 다르다. 이걸 신입한테 설명했다. "그럼 선배님, 그건 거짓말 아니에요?" 거짓말? 아니다. 재미를 위한 장치다. 근데 설명하니까 거짓말 같긴 하다. "유저 경험을 고려한 거지." "네... 근데 확률 표기는 5%잖아요." 맞다. 5%다. 정확히는 5% + (연속 실패 보정). 근데 이걸 UI에 다 쓸 순 없다. 이준호가 뭔가 찝찝한 표정이었다. 나도 그랬다. 2년 차 때. 직관은 쌓이는 거다 점심 먹으면서 이준호가 또 물었다. "선배님은 어떻게 수치를 정해요? 공식 외에." 김치찌개를 먹다가 생각했다. 어떻게 정하지? "...게임 많이 해봐." "네? 그게 답이에요?" 답이다. 근데 답 같지 않다. RPG 밸런싱할 때 내가 참고하는 게임만 20개 넘는다. 디아블로, 로스트아크, 원신, 몬헌, 다크소울, 메이플... 다 해봤다. 무기 공격력, 레벨업 곡선, 보스 체력, 다 뜯어봤다. 그러다 보면 안다. '아, 이 정도면 딱이다' 같은 게 생긴다. 초반 무기 공격력 10~15. RPG 공식이다. 왜? 다들 그렇게 한다. 5면 너무 약하고, 20이면 너무 세다. 체감상. 레벨 10까지는 빠르게. 20까지는 보통. 30부터는 느리게. 왜? 유저가 그걸 원한다. 초반은 성장 체감, 중반은 여유, 후반은 도전. 이게 공식에 없다. 데이터에도 없다. 그냥 아는 거다. 게임 많이 하면. "신입 때는 이해 안 될 거야. 나도 그랬으니까." "...네." 이준호 표정이 묘하다. 이해는 안 되지만 믿어보겠다는 얼굴. 5년 전 나도 저랬다. 선배가 "그냥 해봐, 알게 돼" 이러면 답답했다. 지금은 내가 그 선배다.설명할 수 없는 것들 기획서 쓸 때 제일 힘든 부분. '밸런스 근거' 항목. 개발팀은 근거를 원한다. 당연하다. 숫자 하나하나가 작업이니까. "공격력을 127로 설정한 이유는 DPS 목표치인 140을 충족하면서도 후반 밸런스 붕괴를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그럴듯하다. 근데 진짜 이유는 아니다. 진짜는 이거다. "127이 괜찮아 보였다." 근데 이렇게 쓸 순 없다. 밸런싱 회의 때마다 이런다. PD: "이 보스 체력, 너무 많지 않아?" 나: "시뮬상으론 3분 컷입니다." PD: "음... 그래도 많아 보여." 나: "...10% 줄여볼까요?" PD: "그래, 그게 나을 것 같아." 줄인다. 시뮬 다시 돌린다. 2분 40초. 별 차이 없다. 근데 '느낌'은 다르다. 이게 뭐냐. 과학이냐. 아니다. 감이다. 신입한테 이걸 어떻게 가르치냐. 방법이 없다. "이준호, 이 스테이지 밸런스 한번 잡아봐." "네! 어떤 기준으로요?" "음... 적당히." "...?" 적당히. 게임 기획자의 가장 많이 쓰는 단어. 그리고 가장 애매한 단어. 적당한 난이도. 적당한 보상. 적당한 플레이타임. 다 적당하다. 근데 적당함의 기준이 뭐냐. 없다. 그냥 해보면 안다. 숫자 너머의 게임 3년 차 때 큰 사고 쳤다. 신규 던전 밸런싱. 완벽했다. 시뮬도 돌렸다. 데이터도 맞췄다. 타 게임 벤치마킹도 했다. QA도 통과했다. 런칭했다. 유저 반응: "개노잼." 뭐가 문제인가. 숫자는 다 맞는데. DPS도 맞고, 클리어타임도 맞고, 보상도 적당하고. 근데 재미가 없다. 이유를 찾는 데 일주일 걸렸다. 답은 간단했다. '긴장감'이 없었다. 보스 패턴이 너무 예측 가능했다. 회피 타이밍이 너무 뻔했다. 숫자는 맞는데 플레이가 지루했다. 급하게 패턴 수정했다. 랜덤 요소 추가하고, 페이크 모션 넣고. 숫자는 안 건드렸다. 결과: "이제 할 만하네." 밸런싱이 뭔가. 숫자 맞추기가 아니다. 경험 디자인이다. 이준호한테 이 얘기 했다. "그럼 선배님, 숫자는 왜 조정해요?" "...숫자는 도구야. 경험을 만드는." "경험이요?" "응. 유저가 느끼는 거." 설명이 안 된다. 내 머릿속에선 명확한데 말로 하면 추상적이다. 게임은 숫자다. 근데 숫자가 전부는 아니다.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하냐. 전수할 수 없는 것 신입 교육 담당 맡은 지 6개월. 이준호는 성장했다. 엑셀 다루는 건 나보다 빠르다. 공식도 잘 짠다. 근데 아직 뭔가 부족하다. 숫자는 맞는데 게임이 안 맞다. 기획서는 완벽한데 플레이하면 이상하다. "이준호, 이 밸런스 시트 다시 봐." "어디가 틀렸어요?" "틀린 건 없어. 근데 이상해." "...?" 이상함. 구체적으로 설명 못 한다. 그냥 이상하다. 레벨업 곡선 그래프. 수학적으로 완벽하다. 근데 플레이하면 레벨 15 구간이 지루하다. 왜? 모른다. 그냥 그렇다. 보스 체력. 계산상 3분 컷. 근데 체감상 5분 같다. 왜? 패턴이 루즈해서. 숫자 문제가 아니다. 보상 테이블. 기댓값 완벽하다. 근데 유저는 "보상 짜다"고 한다. 왜? 체감 가치가 낮아서. 숫자로 안 보이는 부분. 이준호한테 이걸 어떻게 가르치냐. "일단 많이 해봐. 시뮬만 믿지 말고." "네..." 답답한 대답. 나도 답답하다. 더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싶은데 방법이 없다. 직관은 전수가 안 된다. 경험으로 쌓는 거다. 게임 1000시간 하면서, 밸런스 조정 100번 하면서, 유저 피드백 욕먹으면서. 선배가 나한테 그랬다. "3년 차 되면 알아." 맞았다. 3년 차에 알았다. 근데 어떻게 아는지는 모른다. 127의 의미 오늘 퇴근 전에 이준호가 다시 물었다. "선배님, 그래서 127은 왜 127이에요?" 아직도 궁금한가 보다. 나도 궁금하다. "...재밌어서." "네?" "127이 재밌어 보였어. 120은 뻔하고, 130은 너무 크고. 127은 좀 특이하잖아." "그게 이유예요?" "응. 그게 이유야." 거짓말은 아니다. 진짜로 127이 눈에 들어왔다. 왜? 모른다. 그냥 그랬다. 이준호 표정이 복잡하다. 이해 안 된다는 얼굴. "신입 때는 답답할 거야. 나도 그랬어." "...그럼 언제 알 수 있어요?" "글쎄. 너도 127 찾을 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맞다. 나도 2년 차 때 몰랐다. 밸런싱은 과학이면서 예술이다. 데이터면서 감각이다. 공식이면서 직관이다. 127은 그냥 127이다. 근거도 있고 없고.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고. 중요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게임이 재밌으면 그게 답이다. 127이든 128이든. 근데 이걸 신입한테 어떻게 설명하냐. 방법이 없다. 그래서 오늘도 말한다. "일단 게임 많이 해봐." 그리고 내일도 127 같은 숫자를 찾는다. 이유 없이. 근거 없이. 그냥 괜찮아 보여서. 5년 차의 직관. 전수 불가. 경험으로만 쌓이는 것. 이준호도 언제가 알게 될 거다. 자기만의 127을.신입이 물을 때마다 5년 차도 답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