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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fluence에 썼던 기획서를 다시 읽으면서

Confluence에 썼던 기획서를 다시 읽으면서

Confluence에 썼던 기획서를 다시 읽으면서 6개월 전의 나 오늘 새 콘텐츠 기획서를 쓰다가 레퍼런스를 찾았다. Confluence를 뒤지니까 6개월 전 기획서가 나왔다. "무한의 탑 시스템 기획서 v1.0". 그때 처음 입사하고 메인으로 맡았던 프로젝트다. 클릭했다. 읽기 시작했다. 5분 만에 얼굴이 뜨거워졌다.뭘 이렇게 썼지 "플레이어는 도전 의식을 느낄 것이다." 근거가 없다. 왜 느끼는데. 무슨 데이터로. "난이도 곡선은 적절하게 설계한다." 적절의 기준이 뭔데. 숫자는 어디 있고. "보상은 플레이어의 기대치를 충족시킨다." 기대치를 어떻게 측정했는데. 설문이라도 했나. 전체가 이런 식이다. 추상적인 단어로 가득하다. "재미있게", "적절하게", "만족스럽게". 구체적인 건 하나도 없다. 표도 엉망이다. 층수별 난이도 테이블인데 1층부터 10층까지만 있다. 11층부터는 "추후 설계"라고 써놨다. 그럼 100층짜리 탑은 어떻게 만들 생각이었는지. 보상 밸런스는 더하다. "골드 1000~5000 지급". 범위가 5배 차이다. 기준이 뭔데. 그냥 감으로 쓴 거다. 당시 개발팀이 이걸 보고 뭐라고 했을지 상상이 간다. "이거 구현하려면 수치가 필요한데요." "아, 네. 제가 추가로 드릴게요." 결국 개발 중간에 기획서를 세 번 갈아엎었다. 그래도 방향은 맞았다 허술한 건 맞다. 하지만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다. 기획 의도를 다시 읽었다. "플레이어가 매일 접속할 이유를 만든다. 단발성이 아닌 지속 콘텐츠로 설계한다. 난이도는 점진적으로 상승하되, 벽이 생기지 않게 한다." 지금 봐도 맞는 말이다. 실제로 무한의 탑은 게임에서 가장 플레이율이 높은 콘텐츠가 됐다. DAU의 82%가 매일 들어간다. 코어 루프도 괜찮았다. "입장 → 전투 → 보상 획득 → 성장 → 다음 층 도전" 이 구조 자체는 출시 후에도 안 바뀌었다. 지금도 똑같다. 문제는 디테일이었다. 숫자를 어떻게 잡을지, 보상을 어떻게 분배할지, 난이도를 어떻게 조절할지. 그게 다 빠져 있었다. 그래도 큰 그림은 맞았다. 그게 다행이다. 만약 방향 자체가 틀렸으면 지금쯤 폐기됐을 거다.숫자를 채워넣는 과정 기획서를 고치기 시작한 건 개발 2주 차였다. 프로그래머가 물었다. "1층 몬스터 체력이 얼마예요?" "아... 잠깐만요." 엑셀을 켰다. 플레이어 평균 공격력을 기준으로 역산했다. 10레벨 기준 공격력 150. 스킬 평균 배율 200%. 크리티컬 확률 15%. 계산기를 두드렸다. "3000입니다." "100층은요?" "...지금 계산할게요." 그날 밤 11시까지 남아서 엑셀 작업했다. 층수별 난이도 곡선을 그렸다. 지수 함수로 증가하되, 10층마다 보스를 넣어서 리듬을 만들었다. 보상 테이블도 다시 짰다. 골드, 경험치, 아이템 드랍률. 전부 플레이어 성장 속도에 맞춰서 계산했다. 3일 동안 숫자만 만졌다. 함수 100개 넘게 썼다. VLOOKUP, IF, INDEX MATCH, 난수 시뮬레이션. 결과물은 10페이지짜리 엑셀 파일이었다. 기획서에 표를 전부 붙였다. Confluence가 느려질 정도로. 개발팀에 공유했다. "이제 구현 가능합니다." 그때부터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테스트와 수정 빌드가 나왔다. QA가 시작됐다. 2일 만에 문제가 터졌다. "30층부터 난이도가 너무 높아요. 진행이 안 됩니다." 데이터를 확인했다. 클리어율이 30층에서 12%로 떨어졌다. 29층까지는 70% 이상이었는데. 문제를 찾았다. 30층 보스 체력이 너무 높았다. 공식에서 계수를 잘못 입력했다. 1.5를 넣어야 하는데 2.5를 넣었다. 수정했다. 다시 테스트했다. 이번엔 50층에서 문제가 생겼다. "보상이 너무 짜요. 노력 대비 효율이 안 나옵니다." 보상 테이블을 다시 봤다. 50층 보상이 40층이랑 거의 차이가 없었다. 증가율을 잘못 계산했다. 또 수정했다. 이런 식으로 3주 동안 계속 고쳤다. 숫자를 바꾸고, 테스트하고, 피드백 받고, 또 바꾸고. 버전이 v3.7까지 갔다. 출시 전날 밤 마지막 점검을 했다. 1층부터 100층까지 직접 플레이했다. 6시간 걸렸다. 밸런스는 맞았다. 난이도 곡선이 자연스러웠다. 보상도 적절했다. 새벽 4시에 퇴근했다.출시 후 3개월 런칭했다. 반응은 좋았다. "무한의 탑 개꿀잼" "매일 할 거 생겨서 좋음" "보상이 쏠쏠함" 유저 리텐션이 올라갔다. 1일 차 90%, 3일 차 75%, 7일 차 68%. 목표치를 넘었다. PD가 만족했다. "이거 잘 만들었어요. 다음 콘텐츠도 부탁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계속 나왔다. 출시 2주 차. 상위 유저들이 100층을 다 깼다. "이제 뭐 해요? 콘텐츠 끝났는데." 급하게 150층까지 확장했다. 기존 공식을 연장해서 숫자를 뽑았다. 2일 만에 기획서 쓰고 개발 들어갔다. 출시 1개월 차. 신규 유저가 30층에서 막혔다. "초반 난이도 너무 높음" "과금 유도하냐" 데이터를 봤다. 신규 유저 30층 클리어율 18%. 기존 유저는 85%인데. 문제를 찾았다. 신규 유저는 장비가 없다. 기존 유저 기준으로 밸런스를 잡았던 게 문제였다. 1~50층 난이도를 전부 하향했다. 긴급 패치로 나갔다. 출시 3개월 차. 보상 인플레이션이 시작됐다. 무한의 탑 보상이 너무 좋아서 다른 콘텐츠를 안 한다는 피드백이 왔다. 전체 밸런스를 다시 봤다. 무한의 탑만 너프 할 수는 없었다. 다른 콘텐츠 보상을 올려야 했다. 경제 밸런스 회의가 3번 열렸다. 결국 전체 재화 수급을 20% 상향 조정했다. 그때 깨달았다. 하나의 콘텐츠는 절대 독립적이지 않다. 전부 연결돼 있다. 지금 다시 쓴다면 오늘 읽은 6개월 전 기획서. 지금 다시 쓴다면 완전히 다르게 쓸 것 같다. 먼저 경쟁사 분석부터 한다. 비슷한 시스템이 있는 게임 5개를 뜯어본다. 난이도 곡선, 보상 구조, 플레이 타임을 전부 분석한다. 그다음 유저 페르소나를 정의한다. 신규, 중수, 고수로 나눈다. 각각 어떤 경험을 원하는지 정리한다. 숫자는 처음부터 다 채워 넣는다. 1층부터 150층까지. 난이도, 보상, 소요 시간. 엑셀 시뮬레이션을 100번 돌린다. 다른 콘텐츠와의 균형도 처음부터 고려한다. 무한의 탑이 전체 재화 수급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정한다. 30%로 잡는다. 나머지 콘텐츠도 함께 조정한다. 리스크도 먼저 생각한다. 상위 유저가 너무 빨리 깨면? 신규 유저가 막히면? 보상 밸런스가 무너지면? 각 상황별 대응 방안을 미리 써놓는다. 그렇게 쓰면 기획서가 30페이지는 넘을 것 같다. 6개월 전에는 10페이지도 안 썼다. 하지만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 경험이 없었다. 뭘 고려해야 하는지 몰랐다. 숫자 감각도 없었다. 지금은 안다. 뭘 놓쳤는지, 뭘 더 봐야 하는지. 그래서 다음 기획서는 더 잘 쓸 수 있다. 허술해도 괜찮다 6개월 전 기획서는 허술하다. 하지만 그게 시작이었다. 그 기획서가 없었으면 무한의 탑도 없었다. 지금 DAU 82%가 플레이하는 콘텐츠도 없었다. 완벽한 기획서는 없다. 처음부터 모든 걸 예측할 수 없다. 유저 반응도, 밸런스 문제도, 다른 시스템과의 충돌도. 중요한 건 방향이다. 코어가 맞으면 나머지는 고칠 수 있다. 숫자는 계속 바뀐다. 밸런스는 계속 조정한다. 런칭 후에도, 3개월 후에도, 6개월 후에도. 기획서는 완성되는 게 아니다. 계속 업데이트된다. v1.0은 시작일 뿐이다. 지금 무한의 탑 기획서는 v8.3이다. 앞으로 v20까지 갈 수도 있다. 그게 게임 기획이다. Confluence 창을 닫았다. 새 기획서를 열었다. 이번엔 더 잘 쓸 수 있다. 6개월 전보다.허술한 기획서도 시작은 된다. 고치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