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가 '재밌게 해줘'라고 할 때 느끼는 무력감

PD가 '재밌게 해줘'라고 할 때 느끼는 무력감

PD가 ‘재밌게 해줘’라고 할 때 느끼는 무력감

오전 10시, 그 한마디

회의실 들어갔다. PD가 프로토타입 플레이했다.

“이거… 재미가 없는데?”

알고 있다. 나도 안다.

“좀 더 재밌게 해줘.”

…네?

회의 끝. 30분 동안 ‘재미’라는 단어 17번 들었다. 구체적인 피드백은 없었다. “그냥 재밌게”가 전부다.

책상 앞에 앉았다. 엑셀 파일 열었다. 데미지 테이블, 성장 곡선, 보상 밸런스. 어디를 어떻게 고쳐야 ‘재밌어’지는 거냐.

재미는 주관이다. 내가 재밌으면 유저는 노잼이고, 유저가 재밌으면 PD는 지루하다고 한다.

그럼 재미가 뭔데.

재미의 정의를 찾아서

점심 먹으면서 기획팀 막내한테 물었다.

“너는 게임 재미가 뭐라고 생각해?”

”…도전과 보상의 균형?”

교과서다. 게임 기획론 3장 내용이다.

프로그래머한테도 물었다.

“버그 없는 거요.”

틀린 말은 아니다.

오후 3시. 다시 회의. 이번엔 구체적으로 물어봤다.

“PD님, 어떤 부분이 재미없었나요?”

“전체적으로?”

“예를 들면 전투 템포요? 보상 간격이요?”

“응… 그냥 다?”

입 다물었다. 더 물어봐야 ‘감으로 해’라는 답만 돌아온다.

회의 끝나고 자리 돌아왔다. Confluence 기획서 열었다. ‘재미 요소’ 항목 있다. 6개월 전 내가 썼다.

  • 명확한 목표 설정
  • 적절한 난이도 곡선
  • 즉각적인 피드백
  • 차별화된 보상

이론은 다 있다. 근데 어디서부터 고쳐야 하냐는 답이 없다.

결국 재미는 숫자로 증명해야 한다. 플레이 타임, 리텐션, 매출. 이 셋으로 정의된다.

재미있으면 오래 한다. 오래 하면 돌아온다. 돌아오면 돈 쓴다.

이게 우리가 말하는 ‘재미’다.

숫자가 된 재미

저녁 7시. QA팀에서 리포트 왔다.

“튜토리얼 이탈률 35%”

높다. 너무 높다.

프로토타입 테스터 10명 중 3명이 10분 안에 껐다는 뜻이다. 재미가 없다는 증거다.

어디가 문제일까. 튜토리얼 플로우 다시 봤다.

  1. 스토리 인트로 (스킵 가능)
  2. 기본 조작 설명
  3. 첫 전투
  4. 캐릭터 강화 유도
  5. 다음 스테이지 진행

플로우는 표준이다. 다른 게임이랑 똑같다.

그럼 뭐가 문제냐.

전투가 지루한가. 데미지 수치를 올려볼까. 아니면 적 체력을 낮출까. 보상을 더 줄까.

엑셀 켰다. 시뮬레이션 돌렸다.

케이스 1: 데미지 20% 상승

  • 전투 시간 30초 → 24초
  • 예상 리텐션 변화: 미미

케이스 2: 튜토리얼 보상 2배

  • 초반 성장 속도 증가
  • 중반 밸런스 붕괴 우려

케이스 3: 튜토리얼 스킵 기능 강화

  • 이탈 방지 효과 불명
  • 핵심 시스템 미습득 리스크

시뮬 결과 봤다. 답이 안 나온다.

숫자는 결과만 보여준다. 왜 재미없는지는 안 알려준다.

재미는 정성이다. 근데 우리는 정량으로 평가한다. 모순이다.

유저 데이터는 말한다

밤 10시. 아직 회사다.

모니터 3개 켜놨다. 왼쪽은 엑셀, 가운데는 Unity, 오른쪽은 유저 피드백.

CBT 끝나고 설문 결과 정리했다.

“전투가 단조롭다” - 18명 “보상이 짜다” - 12명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 9명 “재밌다” - 3명

재밌다는 사람이 3명이다. 42명 중 3명.

PD 말이 맞았다. 재미없다.

근데 어떻게 고쳐야 하냐고.

“전투가 단조롭다”는 피드백 뜯어봤다. 구체적인 내용 없다. 그냥 단조롭다는 것만 안다.

스킬 종류를 늘릴까. 아니면 전투 연출을 화려하게 할까. 적 패턴을 다양화할까.

전부 개발 리소스다. 시간이다. 돈이다.

PD한테 물었다. “어디에 리소스 쓸까요?”

“기획자가 판단해.”

판단 기준을 달라고 했다.

“재미있게 되는 쪽으로.”

다시 원점이다.

결국 매출 예측 시뮬 돌렸다. 각 케이스별로 ARPU, LTV 계산했다.

재미는 모르겠다. 근데 돈은 계산된다.

재미와 매출 사이

새벽 1시. 퇴근 준비했다.

오늘 하루 ‘재미’라는 단어 58번 들었다. 카운트했다.

구체적인 액션 아이템은 3개다.

  1. 튜토리얼 전투 속도 15% 증가
  2. 초반 보상 30% 상승
  3. 스킵 버튼 위치 조정

이게 재미를 만들까.

모르겠다. 근데 해야 한다.

게임 기획자는 재미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게 직업이다.

근데 재미의 정의는 없다. 있는 건 숫자뿐이다.

DAU, 리텐션, ARPU, LTV, ARPPU, CVR.

이 숫자들이 올라가면 ‘재밌다’고 한다. 내려가면 ‘재미없다’고 한다.

유저는 “꿀잼”이라고 한다. 그리고 3일 뒤 안 들어온다.

리텐션 7일차 40%. 재밌으면 60%는 남아야 한다.

결국 재미는 숫자다. 우리 업계에서는.

집 가는 지하철 안에서 생각했다.

내가 게임 기획자 된 이유가 뭐였지.

재밌는 게임 만들고 싶어서였다.

근데 지금 나는 엑셀 돌리고, 데이터 분석하고, 회의에서 ‘재밌게’라는 말만 듣는다.

실제로 게임 만드는 시간은 하루에 2시간도 안 된다.

그래도 계속하는 이유

다음날 출근했다. 어제 조정한 밸런스 빌드 나왔다.

플레이해봤다.

튜토리얼 전투 24초. 6초 줄었다. 확실히 빠르다.

보상도 늘었다. 초반 성장 체감된다.

재밌나?

…모르겠다.

근데 어제보단 낫다.

점심시간. 테스터 막내가 말했다.

“어제보다 나은데요? 좀 더 당기네요.”

‘당긴다’. 좋은 표현이다.

재미있다는 건 아니다. 근데 당긴다.

계속하고 싶게 만든다. 그게 우리가 만드는 재미다.

이상적인 재미는 아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재미도 아니다.

근데 현실적인 재미다. 숫자로 증명되는 재미다.

오후 회의. PD가 빌드 플레이했다.

“어? 이거 괜찮은데?”

구체적인 건 없다. 근데 긍정적이다.

“이 방향으로 계속 가보자.”

회의 끝. 30분 동안 ‘괜찮다’는 말 12번 들었다.

어제는 ‘재미없다’ 17번이었다.

발전이다.


‘재밌게 해줘’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주문이다. 근데 어쨌든 해야 한다. 그게 내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