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 유저 피드백을 읽으며 자책하는 게임 기획자

밤 11시, 유저 피드백을 읽으며 자책하는 게임 기획자

밤 11시 47분

모니터가 눈부시다. 사무실 불 다 꺼졌는데 내 자리만 밝다.

커뮤니티 탭 4개 띄워놨다. 인벤, 디시, 공식 카페, 레딧. 새로고침 누르는 손가락이 아프다.

“이 게임 밸런스는 기획자가 게임을 안 하나봄”

100번째 읽는 댓글이다. 같은 내용. 다른 표현.

손목이 욱신거린다. 마우스 쥔 채로 3시간째다.

이미 고쳤는데

“SSR 확률 0.5%는 사기임. 최소 1%는 돼야지”

다음 주 패치에 0.8%로 올린다. 이미 결정됐다. QA 테스트 중이다.

“탱커 너무 약함. 15초 버티기도 힘듦”

어제 밸런스 시뮬 돌렸다. 방어력 15% 상향, 체력 회복량 20% 증가. 이번 주 금요일 적용.

“코인 파밍이 너무 빡셈. 하루 3시간 해야 겨우 10개”

보상 2배 이벤트 다음 달 1일부터다. 상시 드랍률도 1.5배 올린다.

다 계획 있다. 다 준비 중이다.

근데 왜 욕먹냐.

엑셀 파일 열었다. ‘6월_밸런스_패치_최종_진짜최종_v7.xlsx’

시뮬레이션 3000번 돌렸다. 경우의 수 다 따졌다. 밤새워서.

유저들은 모른다. 이게 얼마나 걸리는지.

소통의 문제

PD가 말했다. “유저 커뮤니케이션 강화하자.”

좋다. 나도 원한다.

근데 뭘 어떻게.

공지 올려봤자 안 읽는다. “공지 보고 오셈 ㅋㅋ” 댓글만 달린다.

개발자 노트 써봤자 세 줄 요약 달린다. 그것도 왜곡돼서.

실시간 답변해봤자 “그래서 언제 고침?” 나온다.

다음 주면 고친다고. 지금 QA 중이라고.

“다음 주면 게임 접어 ㅋㅋ”

접지 마. 제발.

커피 한 모금 마셨다. 식었다. 네 번째 컵이다.

2주 전 기억

런칭 후 첫 밸런스 패치.

SSR 캐릭터 ‘시리우스’ 너프. 공격력 30% 감소.

데이터가 말해줬다. 승률 78%. 픽률 95%. 이건 망하는 거다.

시뮬 100번 돌렸다. 25% 감소도 해봤다. 20%도 해봤다.

30%가 적정이었다. 수학적으로.

패치 적용했다.

커뮤니티가 불탔다.

“과금 유도 ㅋㅋ 강캐 너프해서 다른 캐릭 팔려고”

“3만원 썼는데 너프라니 환불각”

“기획자 게임 접어라”

PD가 불렀다. “유저 반응 심각한데요?”

데이터 보여줬다. 너프 후 승률 52%. 완벽하다.

“데이터는 그렇지만 유저 감정은…”

감정으로 밸런스 잡나.

그 다음 주.

매출 15% 감소. 동접 20% 감소.

내 잘못이다. 숫자는 맞았는데 타이밍이 틀렸다.

할 계획인데

“신규 콘텐츠 없음? 할 거 없어서 접음”

다음 달 대규모 업데이트 온다. 레이드 던전 3개, 신규 캐릭터 5개, PvP 시즌제.

6개월 준비했다. 아직 발표 못 할 뿐이다.

“이벤트가 재탕만 함. 성의 없음”

신규 이벤트 기획서 어제 제출했다. 승인 대기 중. 개발 일정 2주.

“버그 신고한 지 한 달인데 아직도 안 고침”

우선순위 밀렸다. 크리티컬 버그 먼저 잡는다. 순서가 있다.

다 이유가 있다.

근데 설명할 수 없다.

회사 정책상 업데이트 2주 전에만 공지 가능. 미리 말하면 기밀 유출.

개발 일정 공개하면 지연될 때 더 욕먹는다.

버그 우선순위 설명하면 “그것도 못 고침?” 나온다.

그냥 욕먹는 게 낫다.

시계 봤다. 12시 8분.

해결했는데도

3일 전 패치.

탱커 방어력 20% 상향. 체력 회복 25% 증가.

2주 전 건의사항 그대로 반영했다.

기대했다. 이번엔 칭찬 나오겠지.

커뮤니티 들어갔다.

“이제 고침? 늦었음. 이미 많이 접었음”

“20%로는 부족함. 최소 30%는 돼야 함”

“탱커 버프는 좋은데 딜러가 문제임. 왜 딜러는 안 건드림?”

딜러도 건드렸다. 다음 주 패치에. 그것도 계획 있다.

칭찬은 3개였다. 욕은 47개였다.

좋은 평가는 조용히 사라진다. 나쁜 평가는 계속 남는다.

엑셀 창 최소화했다. 볼 기력이 없다.

왜 소통이 안 되나

생각해봤다. 진짜로.

유저는 지금 불편하다. 당장 고쳐지길 원한다.

나는 2주 뒤를 본다. 그때 고쳐진다.

시간차가 문제다.

유저는 체감을 말한다. “탱커가 약해.”

나는 데이터를 본다. “탱커 생존율 48%, 2% 상향 필요.”

언어가 다르다.

유저는 결과를 원한다. “고쳐줘.”

나는 과정을 안다. “QA 통과, 빌드 적용, 검수 완료, 패치 배포.”

속도가 다르다.

스낵 하나 꺼냈다. 오늘 점심 이후 첫 식사다.

씹는데 맛이 없다.

내일 출근하면

10시 회의.

PD가 물을 거다. “커뮤니티 반응 어때요?”

“좋지 않습니다.”

“개선 방안은?”

“다음 주 패치에 반영됩니다.”

“유저들은 만족할까요?”

모르겠다. 솔직히.

패치하면 좋아질까. 아니면 또 다른 불만 나올까.

밸런스는 끝이 없다. 하나 고치면 다른 게 깨진다.

시소 같다. 이쪽 올리면 저쪽 내려간다. 완벽한 중심은 없다.

숫자로는 완벽해도 체감은 다르다.

유저 1000명 중 800명 만족해도 200명 불만이 더 크게 들린다.

마우스 내려놨다. 손목이 아프다.

자책의 시간

내 잘못일까.

밸런스 설계가 잘못됐나. 시뮬이 부족했나.

아니면 소통 방식이 문제인가. 설명을 더 잘 했어야 했나.

공지문 다시 읽어봤다. “밸런스 개선 안내”

전문 용어 많다. 수치 나열만 있다. 감정이 없다.

유저 입장에서 다시 써봤다.

“탱커 유저분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번 패치로 생존력이 크게 좋아집니다.”

이게 낫나.

아니다. 이것도 이상하다.

게임 기획자가 감성팔이하면 안 된다. 데이터로 말해야 한다.

근데 데이터로 말하면 안 읽는다.

딜레마다.

모니터 껐다 켰다. 눈이 침침하다.

5년 차의 고민

신입 때는 몰랐다.

밸런스만 잘 잡으면 되는 줄 알았다. 수치만 완벽하면 되는 줄 알았다.

틀렸다.

게임 기획은 50%가 밸런스고 50%가 심리다.

유저가 뭘 원하는지. 언제 만족하는지. 어떻게 표현하는지.

숫자는 거짓말 안 한다. 근데 사람은 숫자대로 안 움직인다.

승률 50%가 완벽한 밸런스다. 이론상.

근데 유저는 60% 원한다. 자기가 쓰는 캐릭터는.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럼 뭐 하러 하나.

휴지통 봤다. 빈 캔 6개. 오늘 마신 커피다.

내일도 올라올 글

“밸런스 언제 고침?”

다음 주 고친다.

“신규 콘텐츠 언제 나옴?”

다음 달 나온다.

“기획자는 게임 하기나 함?”

매일 한다. 퇴근 후에도 한다.

댓글 달고 싶다. 근데 못 단다.

공식 계정 아니면 발언 금지. 회사 규정이다.

개인 계정으로 달면 신상 털린다. 전에 당한 선배 봤다.

그냥 참는다. 읽기만 한다.

가슴에 담는다. 스트레스로.

마우스 놨다. 손목에 파스 붙일 시간이다.

1시 12분

정리했다.

다음 주 패치: 탱커 상향, SSR 확률 증가, 보상 개선.

다음 달 업데이트: 레이드, 신규 캐릭, 이벤트 3종.

다음 분기 로드맵: PvP 시즌제, 길드 콘텐츠, 스토리 확장.

다 계획 있다. 다 준비 중이다.

근데 말 못 한다.

말해도 안 믿는다.

“어차피 또 미룰 거”

안 미룬다. 이번엔.

가방 챙겼다. 노트북, 파스, 소화제.

불 껐다. 사무실 나왔다.

엘리베이터 타면서 핸드폰 봤다.

커뮤니티 알림 17개.

안 봤다. 내일 보자.

아니다. 지금 봐야 한다. 급한 버그일 수도 있다.

열었다.

“기획자 일 안 하냐 밤 1시인데 공지 없음”

웃겼다. 웃음 안 나왔다.


다음 주 패치 때 좋아해 주면 좋겠다. 근데 기대 안 한다. 이미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