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 출근 후 3분: 주말 동안의 재해를 본다

월요일 아침 출근 후 3분: 주말 동안의 재해를 본다

월요일 아침 9시 57분 사무실 문 열었다. 3분 남았다. 컴퓨터 켰다. 부팅되는 동안 커피 뽑았다. 자리 앉았다. 10시 정각. 슬랙 켰다. 알림 137개. 컨플루언스 켰다. 멘션 23개. 구글 시트 켰다. 댓글 41개. 숨 들이켰다.주말? 그게 뭐였지 금요일 6시. 퇴근했다. "이번 주말은 쉬어야지." 그렇게 생각했다. 토요일 아침 10시. 핸드폰 진동. QA팀 단톡방. "크리티컬 버그 발견." 점심 먹다가. 유저 커뮤니티 확인. "밸런스 개판이네 ㅋㅋ" 500개 추천. 저녁 먹다가. 경쟁사 업데이트 공지. "신규 콘텐츠 대규모 패치." 제길. 일요일도 마찬가지였다. 주말은 있었다. 휴식은 없었다. 첫 번째 재해: 유저 피드백 슬랙부터 봤다. CS팀이 올린 피드백 정리. 토요일 오전 9시부터 일요일 밤 11시까지. 총 217건. 카테고리별로 나눠놨다. 친절하다. 고맙다. 그래도 머리 아프다. [밸런스 문제] 89건"신규 캐릭터 너무 세요. 기존 캐릭 다 쓰레기 됐어요." "이거 너프 안 하면 게임 접어요." "과금 유도 노골적이네요 ㅋㅋ"아니. 출시 전에 시뮬 100번 돌렸다. 데이터 뽑아서 DPS 계산했다. 그래프 그렸다. 기존 S티어랑 5% 차이. 딱 적정선이었다. 근데 유저들은 "사기다" 그러더라.[시스템 버그] 43건"스킬 쓰면 튕겨요." "보상 안 들어와요." "로딩 무한 돌아요."이건 내 파트 아니다. 하지만. 기획 의도대로 구현 안 된 거면 내 책임이다. 명세서 다시 확인해야 한다. 개발팀이랑 체크해야 한다. [콘텐츠 요청] 52건"신규 던전 언제 나와요?" "PVP 모드 추가해주세요." "길드 컨텐츠 부족해요."알아. 다 알아. 로드맵에 다 있다. Q2, Q3에 순차 출시. 근데 유저들은 지금 당장 원한다. "게임 할 게 없어요." 런칭한 지 2주 됐다. [기타] 33건칭찬 5건. 고맙다. 욕 28건. 익숙하다.커피 한 모금 마셨다. 식었다. 두 번째 재해: 버그 리포트 QA팀 지라 확인했다. 주말에 올라온 이슈. 17건. 우선순위 크리티컬 3건. 하이 8건. 미디엄 6건. 크리티컬부터 봤다. [CRITICAL] 특정 조건에서 재화 중복 지급 제목만 봐도 식은땀 난다. 재현 방법 읽었다. "1. A던전 클리어 2. 보상 수령 중 앱 강제 종료 3. 재접속 시 보상 재지급 4. 반복 가능" 망했다. 이거 악용하면 경제 붕괴다. 토요일 오전에 올라왔다. 48시간 방치. 유저들 이미 알까. 커뮤니티 검색했다. "꿀팁 ㅋㅋ" 게시글 3개. 조회수 2천. 망했다. 진짜로.긴급 슬랙 올렸다. "@channel 크리티컬 이슈 발견. 긴급 점검 필요." CTO 답장. "회의실 10분 후." PD 답장. "패치 언제 가능?" 개발팀장 답장. "코드 확인 중." 커피 한 모금 더. 여전히 차갑다. [CRITICAL] 특정 스킬 사용 시 클라이언트 크래시 이것도 심각하다. 재현율 30%. 높다. 특정 캐릭터 특정 스킬. 사용 빈도 높은 스킬이다. 유저들 벌써 불만 터졌겠다. 슬랙 스크롤 올렸다. 역시. CS팀: "해당 스킬 크래시 문의 폭주 중" [CRITICAL] 랭킹 점수 계산 오류 이건 내 파트다. 완전히. 랭킹 알고리즘 내가 짰다. 엑셀로 시뮬 돌렸다. 문제없었다. 근데 실제 환경에서 오류 났다. 변수를 놓쳤다. 어디선가. 수식 다시 확인해야 한다. 지금 당장. 10시 15분. 회의 5분 전. 엑셀 열었다. 수식 찾았다. 있었다. 반올림 함수 하나. 소수점 처리 방식이 달랐다. 찾았다. 하지만. 이미 랭킹 시즌 3일 지났다. 보상 지급했다. 잘못된 랭킹으로. 어떻게 보상하지. 회의에서 싸우겠다. 세 번째 재해: 경쟁사 패치 커뮤니티 탭 하나 더 열었다. 경쟁사 공식 카페. 일요일 오후 6시 공지. "대규모 업데이트 안내" 클릭했다.신규 레이드 5개 신규 캐릭터 3종 PVP 시즌 2 오픈 밸런스 패치 대규모제길. 우리 로드맵에 있던 거다. Q2에 예정. 걔들이 먼저 했다. 댓글 읽었다. "역시 ○○겜이 최고" "□□겜(우리 게임)은 컨텐츠 없음 ㅋㅋ" "갈아탄다" 마케팅팀 슬랙 확인했다. "주말 DAU 12% 하락. 경쟁사 패치 영향 추정." PD한테 리포트 올라갔겠다. 회의에서 또 얘기 나오겠다. "대응 방안 뭐냐"고. 대응이 어딨나. 개발 기간 당길 수 없다. 퀄리티 포기하고 빨리 낼까. 욕먹는다. 천천히 제대로 만들까. 유저 이탈한다. 정답 없다. 커피 다 마셨다. 새로 뽑아야 한다. 10시 20분, 긴급 회의 회의실 들어갔다. PD, CTO, 개발팀장, QA팀장, 마케팅팀장. 나. 시스템 기획. PD가 시작했다. "상황 정리하자. 크리티컬 3건. 커뮤니티 반응. 경쟁사 패치." CTO가 답했다. "재화 중복 지급. 핫픽스 오늘 저녁 가능. 긴급 점검 2시간." "크래시 이슈. 원인 파악 중. 내일 오전까지." "랭킹 오류..." 나 쳐다봤다. 내 차례다. "반올림 함수 문제였습니다. 수정 완료했고요." "이미 지급된 보상은... 롤백 불가능합니다." PD 표정 굳었다. "보상안 어떻게 하지." 마케팅팀장이 말했다. "전체 유저 보상 지급. 사과문 게시. 이게 최선입니다." 비용 계산했다. 대충 3억. PD 한숨 쉬었다. "CFO 설득해야겠네. 알았어." 그리고 경쟁사 얘기 나왔다. "로드맵 당길 수 있나?" 개발팀장이 고개 저었다. "인력 부족합니다. QA 기간 줄이면 모를까." "줄이면 버그 더 난다." 다들 침묵했다. PD가 정리했다. "일단 핫픽스부터. 오늘 저녁 긴급 점검." "사과 보상안 오후까지 확정." "로드맵은... 다음 주 다시 논의." 회의 끝. 30분 걸렸다. 결론: 야근 확정. 책상으로 돌아와서 11시. 이제 시작이다. 할 일 정리했다.랭킹 알고리즘 수정본 개발팀 전달 사과 보상안 기획 (PD 결재용) 긴급 점검 공지문 초안 작성 유저 피드백 분류해서 각 파트 전달 밸런스 데이터 재분석 (신규 캐릭 너프 검토) 다음 주 패치 일정 재조정 QA팀이랑 크래시 이슈 재현 테스트오늘 퇴근. 11시쯤? 슬랙에 메시지 하나 더 왔다. 인턴: "기획서 검토 부탁드립니다~" 20페이지. 오늘 중으로 피드백 달라고. 추가.인턴 기획서 검토커피 뽑으러 갔다. 복도에서 동기 만났다. 클라이언트 프로그래머. "주말 푹 쉬었어?" 웃었다. 대답 안 했다. 쟤도 웃었다. 알겠다는 얼굴. 점심시간 12시 30분. 밥 먹으러 갔다. 사내 식당. 김치찌개. 팀원들이랑 앉았다. 다들 피곤한 얼굴이다. 후배가 물었다. "주말에 쉬셨어요?" "응. 커뮤니티 보면서." "저도요. 버그 리포트 보면서." 다 똑같다. 옆 테이블 아티스트팀도 마찬가지였다. "주말에 이펙트 수정했어." "나도 캐릭터 리터칭." 게임 회사에 주말은 없다. 아니. 있다. 근데 쉬지 못한다. 게임은 주말에도 돌아간다. 유저는 주말에도 논다. 문제는 주말에도 생긴다. 우리는 주말에도 본다. 밥 먹으면서도 슬랙 확인했다. 개발팀: "핫픽스 빌드 완료. QA 넘김." QA팀: "테스트 시작. 2시간 소요 예상." 4시쯤 결과 나온다. 문제없으면. 긴급 점검 공지 6시. 점검 7시~9시. 저녁 먹고 모니터링이다. 오후 2시 사과 보상안 작성 중이다. 엑셀 켰다. 항목 나열했다.골드 50만 (평소 일주일 파밍량) 강화석 100개 (평소 사흘 파밍량) 가챠 티켓 10장 (과금 아이템, 약 1만원 가치) 경험치 부스터 3일권총 가치 계산했다. 유저당 약 15,000원. 전체 유저 20만 명. 30억. PD 결재 안 날 것 같다. 줄였다.골드 30만 강화석 50개 가챠 티켓 5장 경험치 부스터 1일권총 가치 8,000원. 16억. 그래도 많다. 하지만. 이거보다 적으면 유저들 더 화낸다. "성의 없다"고. 기획 의도 적었다. "이번 랭킹 오류로 인해 피해를 입으신 유저분들께 깊이 사과드립니다. 재발 방지를 위해..." 클리셰다. 하지만 먹힌다. PD한테 전달했다. 답장 왔다. "CFO랑 협의 중. 대기." 오후 4시 QA 결과 나왔다. 슬랙 알림 떴다. "핫픽스 빌드 테스트 완료. 이슈 없음." 한숨 나왔다. 안도. 긴급 점검 확정됐다. 공지문 최종 수정했다. "안녕하세요, ○○ 운영팀입니다. 서비스 안정화를 위한 긴급 점검을 진행합니다. [점검 시간] 2024년 4월 15일 (월) 19:00 ~ 21:00 (2시간) [점검 내용]재화 지급 오류 수정 특정 스킬 크래시 수정 랭킹 점수 계산 로직 수정[보상] 긴급 점검 보상은 추후 지급 예정입니다. 이용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마케팅팀 검토 받았다. OK 떨어졌다. 6시에 게시한다. 오후 5시 밸런스 데이터 다시 봤다. 신규 캐릭터 DPS 그래프. 시뮬상으로는 문제없다. 근데 실제 유저 데이터 다르다. PVP 승률 67%. 너무 높다. PVE 클리어 타임 평균 20% 단축. 왜 차이 날까. 시뮬은 "이상적 플레이" 가정한다. 유저는 "최적화된 플레이" 한다. 신규 캐릭터 콤보가 쉽다. 기존 캐릭터 콤보는 어렵다. 숙련도 차이 안 나는데 성능 차이 난다. 이게 문제다. 너프 수치 계산했다. 스킬 데미지 8% 감소. 쿨타임 1초 증가. 이 정도면 승률 58%로 떨어진다. 적정선이다. 기획서 초안 작성했다. 내일 회의 때 얘기 꺼낸다. 커뮤니티 반응 예상된다. "과금 유도하더니 바로 너프 ㅋㅋ" 익숙하다. 오후 6시 긴급 점검 공지 게시됐다. 커뮤니티 반응 확인했다. 예상대로다. "또 점검 ㅋㅋㅋ" "보상 뭐 주냐" "2시간이면 자정까지 못 하네" "출석 체크 못 하겠는데" CS팀한테 미안하다. 오늘 밤 문의 폭주할 거다. 사과 보상 결재 떨어졌다. PD 슬랙: "CFO 승인. 8천원 안으로 확정." 휴. 다행이다. 보상 지급 스케줄 짰다. 점검 종료 후 30분 내 일괄 지급. 개발팀이랑 공유했다. 저녁 7시 긴급 점검 시작됐다. 서버 내렸다. 사무실 불 켜져 있다. 다들 남았다. 개발팀 핫픽스 배포 중. QA팀 최종 검증 대기 중. 나는 모니터링 준비. 유저 반응 체크 도구 열었다.공식 카페 새글 주요 커뮤니티 게시글 트위터 멘션 앱스토어 리뷰다 보고 있어야 한다. 치킨 시켰다. 야근 식대. 팀원들이랑 나눠 먹었다. 먹으면서도 노트북 봤다. 밤 9시 점검 종료 10분 전. 개발팀: "배포 완료. 서버 올림." QA팀: "최종 체크 중." 5분 전. QA팀: "이슈 없음. OK." 정시에 서버 열렸다. 유저들 접속 시작했다. 동접자 수 확인했다. 5천... 1만... 2만... 평소보다 높다. 보상 때문이다. 커뮤니티 확인했다. "보상 왔다" "생각보다 많네?" "이 정도면 인정" "그래도 화남" 60점짜리 반응이다. 나쁘지 않다. CS 문의 확인했다. "보상 안 들어왔어요" 30건. 예상했다. 지급 로직 확인했다. 문제없다. 캐시 문제다. 재접속하면 된다. 답변 템플릿 공유했다. 10시. 크리티컬 이슈 없다. 모니터링 1시간 더 하고 퇴근한다. 밤 11시 사무실 나왔다. 지하철 막차 시간이다. 핸드폰 봤다. 슬랙 알림 3개 더. 내일 확인한다. 오늘은 이제 끝이다. 집 도착했다. 12시. 씻고 침대에 누웠다. 핸드폰 다시 켰다. 습관이다. 커뮤니티 한 번 더 봤다. "긴급 점검 후기: 개선됐다는데 체감 안 됨" 내일 또 싸운다.월요일은 항상 이렇다. 주말 동안 쌓인 재해를 월요일 아침에 본다. 처리한다. 또 쌓인다. 다음 월요일에 또 본다. 게임 기획자의 일상이다. 끝은 없다.

게임은 사랑인데 회사가 문제다: 덕업일치의 함정

게임은 사랑인데 회사가 문제다: 덕업일치의 함정

덕업일치라고 믿었던 그때대학교 3학년 때였다. 게임 동아리에서 밤새 게임하다가 문득 생각했다. "이거 직업으로 하면 되겠네." 주변 사람들은 다 말렸다. 부모님은 "게임이 무슨 직업이냐"며 공무원 시험을 권했다. 교수님은 "안정적인 대기업 가라"고 했다. 근데 나는 확신했다. 게임 기획자가 되면 하루 종일 게임 하면서 돈 버는 거라고. 좋아하는 걸로 밥 먹고사는 게 덕업일치라고. 지금 생각하면 웃긴다. 취업 준비 1년. 포트폴리오 20개 넘게 만들었다. 게임 플레이 분석, 시스템 기획서, 밸런스 시트. 밤새 작업한 거 면접에서 10분 만에 까였다. "이건 현실성이 없어요." 그래도 포기 안 했다. 게임은 사랑이니까. 입사했을 때 기뻤다. 드디어 꿈을 이뤘다고 생각했다. 신입 연봉 3200만원. 적지만 괜찮았다. 좋아하는 일 하는데 돈이 문제냐. 첫날 출근. 선배가 말했다. "게임 좋아해서 왔구나. 6개월 뒤에 얘기해보자." 그때는 무슨 소린지 몰랐다. 숫자가 재미를 이긴 날3개월 차. 첫 프로젝트 킥오프 미팅이었다. PD가 들어왔다. "이번 게임 목표 매출 200억입니다." 재미 얘기는 없었다. 매출 얘기만 2시간 했다. 과금 구조 먼저 짰다. 게임 시스템보다 결제 창이 먼저였다. 확률형 아이템 뽑기, 성장 구간별 과금 유도 포인트, 일일 미션 보상 설계. 내가 만들고 싶었던 건 이게 아니었다. "이 캐릭터 밸런스 너무 약한데요. 버프 좀 줘야죠." 내가 말했다. 개발자도 동의했다. 재미를 위해선 당연한 조정이었다. PD가 말했다. "이 캐릭터 과금 캐릭터예요. 약하면 안 팔려요. 유저가 강한 거 사게 놔둬요." 그날 처음 알았다. 밸런스 조정이 재미를 위한 게 아니라 매출을 위한 거란 걸. 엑셀 시트 열었다. 무과금 유저 성장 곡선, 소과금 유저 성장 곡선, 고과금 유저 성장 곡선. 세 그래프가 절묘하게 벌어지게 만들어야 했다. 무과금은 느려도 되고. 소과금은 적당히 빠르고. 고과금은 압도적으로. "이거 Pay to Win 아닌가요?" 내가 물었다. "그게 비즈니스 모델이에요." 선배가 대답했다. 유저 입장에선 똥겜이다. 기획자 입장에선 회사 지시다. 런칭 전날의 허무함 밤 11시. 사무실에 불 켜진 곳은 우리 팀뿐이었다. 런칭 D-1. 마지막 밸런스 조정 중이었다. 근데 우리가 조정한 게 아니었다. 운영팀 요청으로 과금 수치를 또 올렸다. "첫 주 매출이 중요해요. 초반 아이템 가격 20% 더 올려주세요." 프로그래머가 한숨 쉬었다. "이러면 유저들 욕하는데." PD가 말했다. "첫 주만 넘기면 돼요. 나중에 이벤트로 돌려주면 되죠." 나는 말이 안 나왔다. 새벽 2시. 최종 빌드 확인했다. 내가 6개월 동안 만든 게임이었다. 재밌었다. 시스템은 탄탄했다. 밸런스도 나름 괜찮았다. 근데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과금 압박이 너무 강했다. 10레벨까지 가려면 돈 쓰거나 2주 걸렸다. 경쟁 시스템은 과금 유저 잔치였다. 무과금은 구경만 하라는 설계. 동아리에서 밤새 했던 게임들이 떠올랐다. 그때는 재미있어서 했다. 돈 안 써도 됐다. 실력으로 이겼다. 지금 내가 만든 건 뭔가. 아티스트가 말했다. "우리 게임 너 할 거야?" 나는 대답 못 했다. 안 할 것 같았다. 내가 만들었는데. 유저 반응이 칼이 되는 순간런칭 당일. 오전 10시. 앱스토어 리뷰 새로고침 했다. 5분마다 댓글이 달렸다. "과금 압박 심하네", "무과금은 하지 마세요", "밸런스 개판". 가슴이 아팠다. 내 이름이 나온 건 아닌데 내 얘기 같았다. 내가 설계한 수치였으니까. 커뮤니티는 더 심했다. "기획자 머리에 뭐 들었나", "이걸 테스트도 안 하고 냈나", "매출만 생각하네". 맞는 말이었다. 실제로 매출만 생각했으니까. 오후 3시. 긴급 회의 소집됐다. 운영팀장이 말했다. "유저 반응 안 좋아요. 근데 매출은 목표치 90% 달성 중입니다." PD가 웃었다. "그럼 됐네요. 리뷰는 이벤트로 달래고." 기획팀장이 나를 봤다. "밸런스팀은 유저 달래는 이벤트 기획해줘요. 오늘 중으로." 내가 만든 문제를 내가 땜질하는 구조였다. 밤 10시. 이벤트 기획서 작성 중이었다. "무료 아이템 지급", "성장 구간 완화", "과금 아이템 할인". 땜질이었다. 근본적 해결이 아니었다. 어차피 다음 업데이트 때 또 과금 압박 강화할 거였다. 선배가 말했다. "적응해. 이게 현실이야." 나는 대답 안 했다. 적응하고 싶지 않았다. 회의실에서 죽는 기획 "이번 신규 콘텐츠는 레이드 던전입니다." 내가 발표했다. 기획서 40페이지. 2주 걸렸다. 협력 시스템, 역할 분담, 패턴 설계. 재미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PD가 물었다. "과금 포인트는?" 나는 대답했다. "실력으로 클리어 가능하게 만들었어요." 회의실 분위기가 싸해졌다. "다시 만들어와요. 과금 유저 전용 콘텐츠로." PD가 말했다. "무과금은 입장 티켓부터 막아요. 재화 소모 크게 하고." 내가 물었다. "그럼 유저 절반은 못 하는데요." PD가 대답했다. "그 절반이 매출 기여 0%예요." 기획서가 쓰레기통에 들어갔다. 2주가 날아갔다. 다시 만들었다. 입장 티켓 과금제, 보상 확률형, 강화 재료 판매. 재미는 빠지고 수익 모델만 남았다. 통과됐다. "이제 그럴듯하네요." PD가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개발자가 복도에서 말했다. "너도 힘들지?" 힘들었다. "처음엔 다 그래. 나도 게임 좋아서 왔거든." 그는 이제 게임 안 한다고 했다. 퇴근하면 영화 본다고. 게임은 질렸다고. 나도 그렇게 되는 건가. 덕업일치의 진실 1년 차 끝날 무렵. 친구를 만났다. "게임 회사 어때?" 친구가 물었다. "재밌어?" 나는 웃었다. "응. 재밌어." 거짓말이었다. 집에 와서 게임을 켰다. 다른 회사 게임이었다. 재밌었다. 2시간 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이 밸런스는 이렇게 짰구나.' '이 과금 구조는 저렇게 유도하네.' '이건 매출 목표가 얼마였을까.' 게임을 게임으로 못 보고 있었다. 전부 수치로 보였다. 기획 의도가 보였다. 비즈니스 모델이 보였다. 재미가 사라졌다. 예전엔 게임이 좋았다. 스토리에 몰입했고 전투가 짜릿했다. 레벨업이 기뻤고 아이템 획득이 즐거웠다. 지금은 다 계산이다. '이 구간 성장 속도 0.8배네.' '확률 테이블 너무 짜네.' '과금 압박 타이밍 여기서 주네.' 직업병이었다. 고칠 수 없었다. 게임을 사랑했다. 지금도 사랑한다. 근데 게임 회사는 싫다. 이게 모순이라는 걸 안다. 덕업일치. 좋아하는 걸 직업으로 삼으면 행복할 줄 알았다. 틀렸다. 좋아하는 걸 직업으로 삼으면 더 이상 좋아할 수 없게 된다. 그래도 퇴사는 못 한다 5년 차다. 연봉은 올랐다. 5200만원. 게임은 여전히 좋다. 근데 게임 회사는 여전히 싫다. 매일 아침 출근한다. 유저 피드백 확인한다. "밸런스 똥겜." 맞는 말이다. 내가 만들었으니까. 근데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팀 전체가, 회사 전체가 매출을 본다. 재미는 부차적이다. 유저 만족도는 지표일 뿐이다. 가끔 생각한다. 인디 게임 만들까. 매출 신경 안 쓰고 재미만 추구하는 게임. 근데 현실이 있다. 월세가 있고 생활비가 있다. 5200만원 버리고 월급 없이 못 산다. 동아리 후배가 연락 왔다. "형 회사 들어가고 싶어요." 나는 말했다. "다른 데 알아봐." "왜요? 형은 덕업일치 하잖아요." 덕업일치. 웃긴다. "응. 그래. 덕업일치야." 나는 거짓말했다. 오늘도 출근한다. 엑셀 연다. 밸런스 시트 수정한다. 과금 수치 조정한다. 유저는 욕한다. 회사는 매출 본다. 게임은 여전히 사랑한다. 퇴근하면 다른 게임 한다. 직업병으로 뜯어보면서. 회사가 문제다. 산업이 문제다. 구조가 문제다. 근데 나는 못 나간다. 이게 덕업일치의 함정이다.덕업일치는 환상이다. 좋아하는 걸 직업으로 삼는 순간 좋아할 수 없게 된다. 그래도 나는 오늘도 출근한다. 이게 현실이니까.

손목이 울고 있습니다: 게임 기획자의 직업병

손목이 울고 있습니다: 게임 기획자의 직업병

손목이 울고 있습니다: 게임 기획자의 직업병 오늘도 손목은 비명을 지른다 아침 10시. 출근해서 마우스 잡는다. 손목이 쑤신다. 어제도 밤 10시까지 잡았던 그 마우스. 밤새 식지도 않았을 것 같다. 엑셀을 켠다. 밸런스 시트가 열린다. 숫자가 3000개쯤 된다. 하나하나 클릭해서 조정한다. 클릭, 드래그, 복사, 붙여넣기. 이게 내 일이다. 손목은 정직하다. 딱 2시간 지나면 신호를 보낸다. '이제 그만 좀 하자.' 무시한다. 일이 끝나야 쉴 수 있다. 일은 끝나지 않는다.오른손이 특히 심하다. 마우스 잡는 손. 5년간 쉬지 않고 일한 손. 손목터널증후군이라고 한다. 의사가 말했다. "직업을 바꾸시거나, 습관을 바꾸시거나." 직업을 바꿀 수 없다. 습관을 바꿀 수도 없다. 기획은 마우스로 하는 거다. 보호대를 샀다. 검은색 손목 보호대. 게임 기획자 10명 중 7명이 찬다. 우리의 훈장이다. 우리의 치욕이다. 의자가 내 몸을 기억한다 하루 10시간. 의자에 앉아있는 시간이다. 점심시간 빼면 9시간. 화장실 가는 시간 빼면 8시간 반. 그래도 10시간이 맞는 것 같다. 엉덩이가 의자 모양이 됐다. 허리는 C자다. 거북목은 기본이다. 어깨는 항상 굳어있다. 작년에 좋은 의자를 샀다. 80만원짜리. 회사가 50만원 지원해줬다. "직원 건강이 중요하니까요." 고맙다. 정말로. 의자는 좋다. 허리를 받쳐준다. 팔걸이 높이를 조절할 수 있다. 목 받침도 있다. 그래도 아프다. 10시간을 앉아있으면 어떤 의자든 소용없다.점심 먹고 졸음이 온다. 커피를 마신다. 다시 앉는다. 오후 3시쯤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한다. 30초. 다시 앉는다. 동료가 말한다. "형, 요즘 자세 더 구부정해진 것 같은데요?" 알고 있다. 거울 보면 알 수 있다. 모르는 척한다. "그래? 피곤해서 그런가." 정형외과에서 말했다. "허리 디스크 초기예요. 지금부터 관리 안 하면 30대 중반엔 위험합니다." 나는 지금 30살이다. 물리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일주일에 3번. 퇴근하고 가라고 했다. 퇴근이 8시다. 병원은 7시에 문 닫는다. 운동을 해야 한다는 건 안다 헬스장 등록했다. 3개월 끊었다. 20만원. 3번 갔다. 한 번에 6만 6천원 꼴이다. 비싼 샤워였다. 아침에 가려고 했다. 7시에 일어나야 한다. 못 일어났다. 어제 밤 12시에 잤다. 7시간도 못 잤다. 퇴근하고 가려고 했다. 8시 퇴근. 9시까지 갈 수 있다. 못 갔다. 야근이었다. 런칭 2주 전이다. 주말에 가려고 했다. 토요일 오전이면 된다. 못 갔다. 금요일 밤에 긴급 패치가 터졌다. 토요일 오후 2시에 일어났다. 몸이 안 움직였다.3개월이 지났다. 재등록 문자가 왔다. "회원님, 운동 효과 느끼셨죠? 재등록 하시면 10% 할인!" 안 느꼈다. 3번 갔다. 요가를 해볼까 생각했다. 유튜브 영상을 틀었다. "하루 10분이면 됩니다." 10분도 없다. 퇴근하면 9시다. 저녁 먹으면 10시다. 씻으면 11시다. 내일 밸런스 시트 봐야 한다. 걷기라도 하려고 했다. 출퇴근길에. 회사까지 2.5km. 걸으면 30분. 버스 타면 15분. 15분이 아깝다. 그 15분에 잠을 더 잔다. 동료 하나는 새벽 러닝을 한다. 5시 반에 일어나서 5km 뛴다. "형도 해봐요. 개운해요." 대단하다. 나는 못 한다. 런칭 끝나고 해볼까. 런칭은 3개월에 한 번씩 온다. 스트레칭 영상은 즐겨찾기에만 있다 유튜브 즐겨찾기에 영상이 12개 있다. 전부 스트레칭 영상이다. '거북목 해결', '손목터널증후군 완화', '허리디스크 예방'. 하나도 안 본다. 저장만 한다. '나중에 봐야지.' 나중은 오지 않는다. 저장한 게 6개월 전이다. 가끔 본다. 런칭 직후. 몸이 완전히 망가졌을 때. 영상을 틀고 따라한다. 5분. "아, 시원하다." 다음 날도 하려고 한다. 안 한다. 책상 옆에 폼롤러가 있다. 1년 전에 샀다. 쓴 횟수 10번 정도. 지금은 가방 거치대다. 회사에서 스트레칭 교육을 했다. 강사가 왔다. "여러분, 한 시간마다 일어나서 스트레칭 하세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안 한다. 점심시간에 산책하라고 했다. 회사 뒤에 공원이 있다. 10분이면 한 바퀴 돌 수 있다. 가본 적 없다. 점심 먹고 카페 가서 커피 마신다. 다시 일한다. 통증은 익숙해진다 아침에 일어나면 손목이 뻣뻣하다. 주먹을 쥐었다 펴는 데 30초 걸린다. 손가락이 굳어있다. 처음엔 무서웠다. '이거 큰일 나는 거 아닌가.' 병원 갔다. 약 받았다. 먹었다. 나았다. 다시 아팠다. 이제는 익숙하다. '오늘도 아프네.' 그냥 움직인다. 마우스를 잡는다. 일을 한다. 통증은 배경음악이 됐다. 허리도 그렇다. 오후 3시쯤 되면 쑤신다. '아, 또 이 시간이구나.' 자세를 바꾼다. 5분 버틴다. 다시 구부정해진다. 목도 그렇다. 고개를 돌리면 뚝뚝 소리가 난다. 20대 중반부터 났다. 이제 30살인데 소리가 더 커졌다. 동료들과 통증 자랑을 한다. "나 어제 손목 너무 아파서 마우스 왼손으로 잡았어." "나는 허리 때문에 서서 일했어." "나는 목 안 돌아가서 모니터를 옆으로 옮겼어." 웃으면서 한다. 웃기는 얘기가 아닌데 웃는다. 안 웃으면 슬프다. 진통제는 서랍에 항상 있다 책상 서랍을 연다. 진통제가 4통 있다. 타이레놀, 게보린, 이브, 펜잘.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 오늘은 손목이 아프다. 타이레놀을 먹는다. 30분 뒤 덜 아프다. 일을 계속한다. 내일은 허리가 아프다. 게보린을 먹는다. 1시간 뒤 덜 아프다. 일을 계속한다. 모레는 목이 아프다. 이브를 먹는다. 효과가 약하다. 펜잔을 추가로 먹는다. 일을 계속한다. 의사가 말했다. "진통제는 증상만 가리는 거예요. 근본적인 치료가 필요해요." 알고 있다. 치료할 시간이 없다. 약사가 말했다. "이거 자주 드시면 위에 안 좋아요." 알고 있다. 위도 이미 안 좋다. 야근하면서 커피 너무 많이 마셨다. 한 달에 진통제 40알 먹는다. 하루 평균 1.3알. 괜찮은 건가. 아닌 것 같다. 어쩔 수 없다. 30대가 두렵다 지금 30살이다. 5년 뒤면 35살이다. 이 상태로 5년 더 버틸 수 있을까. 선배가 있었다. 38살. 게임 기획 15년차. 손목 수술했다. 3개월 쉬었다. 복귀했다. 1년 뒤 퇴사했다. "더는 못 하겠더라." 다른 선배도 있었다. 40살. 허리디스크 수술했다. 6개월 쉬었다. 복귀 안 했다. 지금 프리랜서 컨설턴트 한다. 또 다른 선배는 35살에 목디스크 왔다. 지금도 일한다. 목에 보조기 차고. "돈 벌어야지 뭐." 슬프다. 내 미래가 보인다. 35살에 수술. 40살에 재수술. 45살에 은퇴. 아니면 평생 통증 안고 살기. 게임 기획이 좋다. 정말 좋다. 내가 만든 밸런스로 유저가 재밌어하면 뿌듯하다. 하지만 몸이 망가진다. 확실히 망가진다. 변명은 많다 "런칭 끝나면 운동할 거야." 런칭은 3개월마다 온다. 끝나고 나면 다음 런칭 준비다. "이번 프로젝트만 끝내면 쉴 거야." 프로젝트는 끝나지 않는다. 끝나면 새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연차 써서 병원 갈 거야." 연차는 썼다. 집에서 잤다. 병원은 안 갔다. "주말에 꼭 스트레칭 할 거야." 주말엔 피곤하다. 평일에 쌓인 피로를 푼다. 스트레칭은 다음 주말로. "다음 달부터 헬스장 다닐 거야." 다음 달이 왔다. 또 다음 달로 미룬다. 변명이 습관이 됐다. 나 자신한테 거짓말하는 게 익숙하다. 이러면 안 되는 거 안다. 바꾸는 게 어렵다. 회사는 신경 쓴다 (조금만) 회사가 간식을 준다. 과일, 빵, 요거트. 고맙다. 건강에 좋다. 손목은 안 나아진다. 회사가 안마의자를 뒀다. 3층 휴게실에. 점심시간에 쓸 수 있다. 줄이 길다. 5명 대기. 10분씩 쓴다. 내 차례 올 때까지 30분. 점심시간은 1시간. 밥 먹을 시간 없다. 회사가 스탠딩 책상을 줬다. 신청하면 바꿔준다. 3명 신청했다. 2명은 다시 일반 책상으로 바꿨다. "서 있으니까 다리 아파요." 회사가 재택근무를 준다. 주 1회. 화요일이나 목요일. 집에서 일한다. 더 오래 일한다. 출퇴근 시간만큼 더 일한다. 몸은 더 안 좋아진다. 회사는 노력한다. 인정한다.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일의 양을 줄이는 게 답이다. 그건 안 된다. 회사는 성장해야 한다. 동료들도 다 아프다 팀 회식 자리. 술 마시면서 하는 얘기. "형, 손목 어때요?" "망했지 뭐." 5명 중 4명이 손목 보호대 찬다. 나머지 1명은 신입이다. 1년 뒤면 찰 거다. 프로그래머들도 똑같다. 아티스트들도 똑같다. QA팀도 똑같다. 게임 회사는 다 아프다. "우리 이러다 다 같이 망가지는 거 아니야?" 누군가 웃으면서 말한다. 다들 웃는다. 맞는 말이라 웃는다. 정형외과 추천 리스트가 있다. 사내 위키에. 손목, 허리, 목 파트별로 정리돼 있다. 병원 이름, 의사 이름, 대기 시간까지. 슬픈 위키다. "○○병원 괜찮았어요?" "거기 좋아요. 근데 예약 2주 걸려요." "그럼 급할 땐 어디 가요?" "응급실요." 이게 정상이 아닌 건 안다. 하지만 이게 우리 일상이다. 그래도 못 멈춘다 손목이 아프다. 허리가 아프다. 목이 아프다. 그래도 출근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한다. '오늘은 일찍 퇴근해야지.' 저녁 9시에 퇴근한다. 내일은 꼭 스트레칭하겠다고 다짐한다. 내일도 안 한다. 이번 주말엔 운동하겠다고 약속한다. 주말에 집에서 잔다. 왜 못 멈출까. 일이 좋아서? 반은 맞다. 습관이라서? 반은 맞다. 두려워서일 수도 있다. 멈추면 뒤처질 것 같다. 쉬면 대체될 것 같다. 그래서 쉬지 못한다. 30살에 이미 몸이 망가졌다. 40살엔 어떻게 될까. 50살까지 일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해답은 없다 이 글을 쓰면서도 손목이 아프다. 키보드 치는데 쑤신다. 마우스 잡을 때마다 신호가 온다. 해답을 찾고 싶었다. 없다. 있다면 실천이다. 실천이 안 된다. "일을 줄여라." 못 줄인다. 줄이면 경쟁에서 밀린다. "운동을 해라." 시간이 없다. 만들어야 하는데 못 만든다. "병원에 가라." 간다. 약 받는다. 안 낫는다. 생활습관이 문제다. 결국 선택이다. 건강을 택하거나, 일을 택하거나. 나는 계속 일을 택한다. 그래서 계속 아프다. 30대 게임 기획자의 솔직한 고백이다. 멋있지 않다. 슬프다. 하지만 진짜다.손목 보호대 끼고 엑셀 켰다. 오늘도 밸런스 잡는다.

프로그래머와의 첫 구현 회의: 기획의도는 죽는다

프로그래머와의 첫 구현 회의: 기획의도는 죽는다

프로그래머와의 첫 구현 회의: 기획의도는 죽는다 오전 10시, 희망에 찬 기획서 회의실 예약했다. 10시 30분. 프로그래머 두 명, 나. 어젯밤까지 쓴 기획서 준비됐다. "이번 스킬 시스템은 완벽해." 3주 동안 경쟁작 분석했다. 밸런스 시뮬레이션 100번 돌렸다. 유저 피드백 200개 정리했다. 엑셀 시트 15개. 기획의도는 명확했다. "스킬 조합의 재미." 최대 5개 스킬 동시 발동. 각 스킬마다 시너지 효과. 조합 가능 수 126가지. 프린트한 기획서 두께 1cm. 이거면 된다고 생각했다.10시 31분, 첫 질문 "형, 이거 실시간이에요?" 프로그래머 민수. 경력 7년차, 서버 개발. 항상 핵심을 찌른다. "네, 스킬 발동하면 즉시 판정이요." "동시 발동이 5개요?" "네." "그럼 서버에서 매번 조합 계산해야 되는데." 엑셀 시트 넘겼다. 조합별 시너지 테이블. 126가지 경우의 수. "이거 다 DB 조회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네요." 민수가 계산기 두드렸다. 동시접속 3000명 가정. 초당 스킬 사용 평균 5회. DB 조회 3000 x 5 x 5 = 75,000 쿼리. "서버 죽습니다." 회의 시작 1분 만에. 기획의도 1차 사망. 10시 45분, 대안 찾기 "그럼 캐싱하면 되지 않나요?" 클라이언트 개발 지훈이가 말했다. 경력 3년, 유니티 전문. "조합 테이블 전부 클라에 들고 있으면요." 민수가 고개 저었다. "126가지 조합인데, 스킬이 50개면 몇 개죠?" "계산 안 해봐도... 많죠." 지훈이가 덧붙였다. "그리고 밸런스 패치 때마다 클라 업데이트요?" "앱스토어 심사 2주 기다리고요." 아. 생각 못 했다. "실시간이 아니면 안 돼요?" 민수가 물었다. 기획의도는 '즉각 피드백'이었다. 스킬 누르면 바로 효과. 타격감, 폭발감, 쾌감. "...안 되는데." "그럼 조합 수 줄이셔야 돼요." 126가지에서 얼마로? "20개 정도면." 1/6로 줄이라고.11시 10분, 성능 이슈 20개로 줄였다. 스킬 조합 20가지.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형, 이펙트는요?" 지훈이가 물었다. "스킬마다 고유 이펙트 있고, 조합 시너지 이펙트 추가로요." 기획서 7페이지 펼쳤다. 조합별 이펙트 연출안. 화려하게 터지는 거. "이펙트 20개 동시 재생이요?" "응, 5개 스킬 + 시너지 이펙트들." 지훈이 표정이 어두워졌다. "저사양 폰 죽어요." "요즘 폰 성능 좋잖아요." "타겟 유저 50%는 3년 전 폰 써요." 아. 또 생각 못 했다. "파티클 수 줄이면 되지 않아요?" "줄이면 이펙트가 화려하지 않은데요." 기획의도는 '화려한 연출'이었다. 유튜브 숏츠에 올라갈 만한 거. 바이럴 날 만한 거. "프레임 30 아래로 떨어지면 유저들 난리 나요." 지훈이가 유저 리뷰 캡처 보여줬다. "최적화 똥겜" "갤럭시 S9에서 렉 걸림" "환불해주세요" 기획의도 2차 사망. 11시 40분, API 한계 "서버 부하 줄이려면 턴제로 가는 게." 민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턴제요?" "네, 실시간 말고 턴 기반 전투." 기획서 1페이지. "실시간 액션 RPG" "그럼 장르가 바뀌잖아요." "장르 안 바뀌고는 이 기획 못 살려요."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민수가 계속 설명했다. 현재 서버 아키텍처는 턴제 최적화. 실시간 동기화 구조 없음. 새로 만들려면 2달. 인력 3명 투입. "PD님이 허락 안 하실 텐데요." 일정은 이미 타이트했다. 런칭 4개월 남았다. 새 시스템 개발 시간 없다. "그럼 스킬 발동을 순차적으로 하면요?" 내가 물었다. "그럼 '동시 발동'이 아니잖아요." 기획서 3페이지. "최대 5개 스킬 동시 발동" "순차 발동이랑 동시 발동이랑 재미가 다른데." "형, 재미는 저도 알아요. 근데 못 만들어요." 민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API 한계예요. 지금 구조로는 안 돼요."12시 10분, 타협안 회의 1시간 40분. 점심시간 넘어갔다. 화이트보드 가득 적힌 제약사항들.서버: 동시 처리 불가 클라: 이펙트 최적화 필요 일정: 2달 이상 작업 불가 구조: 턴제 기반"그럼 이렇게 하면 어때요." 내가 화이트보드에 썼다.스킬 조합 10가지로 축소 동시 발동 → 0.5초 간격 순차 발동 이펙트 단순화, 저사양 모드 추가 조합 테이블 클라 캐싱"이 정도면 할 만해요?" 민수랑 지훈이가 고개 끄덕였다. "개발 기간은요?" "3주요." "테스트 포함해서요?" "...4주요." 일정표 다시 짰다. 다른 기능들 미루고. 이거 먼저 넣고. "OK, 그럼 이걸로 PD님한테." 회의 끝. 기획서는 반토막 났다. 15페이지에서 7페이지로. 126가지 조합에서 10가지로. 동시 발동에서 순차 발동으로. 처음 의도한 거랑 완전히 달라졌다. 오후 2시, 기획서 다시 쓰기 자리 돌아와서 엑셀 켰다. 조합 테이블 다시 짰다. 126가지에서 10가지 추리기. 가장 재밌을 거 같은 거. 가장 밸런스 잡힌 거. 3주 작업이 3시간으로. 기획의도는 뭐였나. "스킬 조합의 재미" 10가지도 재밌을까? 126가지만큼? 모르겠다. 만들어봐야 안다. 컨플루언스에 기획서 업데이트. 제목 수정. "스킬 동시 발동 시스템 v2.0 (구현 가능 버전)" 괄호 안 문구가 슬프다. 오후 4시, PD 보고 PD님 자리 찾아갔다. "시스템 기획 수정본이요." "많이 바뀌었네?" "네, 구현 검토하면서요." PD님이 기획서 훑었다. 10초 만에 핵심 파악. "조합 수 왜 줄었어?" "서버 부하 때문에요." "10개로 재미 나올까?" "...최선을 다해볼게요." PD님이 한숨 쉬었다. "우리가 만들고 싶은 거랑 만들 수 있는 거는 다르니까." "네." "유저들이 재밌어하면 그게 맞는 거야." "알겠습니다." 보고 끝. 돌아 나왔다. 복도에서 민수 마주쳤다. "형, PD님 뭐래요?" "오케이래." "다행이네. 근데 형 표정이 왜 그래요." "아니, 괜찮아." 괜찮지 않았다. 오후 6시, 혼자 생각 퇴근 전에 경쟁작 켰다. '킹덤 오브 레전드' 스킬 시스템 봤다. 조합 가능한 게 50가지 넘어 보였다. 실시간으로 터진다. 이펙트 화려하다. 프레임 드랍 없다. "얘네는 어떻게 한 거지?" 개발 기간 2년. 개발비 50억. 개발팀 80명. 우리는 4개월에 15명. 답 나왔다. 창 닫았다. 기획자의 숙명이다. 머릿속 완벽한 기획. 현실에선 반의반. "API 한계" "성능 이슈" "일정 부족" "인력 부족" 이 단어들 앞에서. 기획의도는 맥없이 죽는다. 그래도 만들어야 한다. 10가지 조합이라도. 순차 발동이라도. 단순한 이펙트라도. 유저가 재밌다고 하면. 그게 정답이다. 오후 8시, 퇴근길 회사 나섰다. 편의점 들렀다. 에너지 드링크 샀다. 집 가는 지하철. 핸드폰으로 엑셀 열었다. 10가지 조합 밸런스 체크. 옆자리 사람이 쳐다봤다. "저 사람 왜 지하철에서 엑셀을." 퇴근길에도 일한다. 기획자니까. 다음 정거장 도착 안내방송. 핸드폰 꺼졌다. 배터리 없다. 창밖 봤다. 어둡다. 내일 또 회의 있다. "UI 구현 검토 회의" 또 죽겠지. 기획의도.프로그래머가 "안 돼요"라고 하면, 기획자는 기획서를 다시 쓴다. 이게 현실이다.

유저 데이터를 보면: 계획은 이렇게 무너진다

유저 데이터를 보면: 계획은 이렇게 무너진다

유저 데이터를 보면: 계획은 이렇게 무너진다 월요일 아침, 데이터 앞에서 출근했다. 커피부터 뽑았다. 엑셀 파일 열었다. 지난주 금요일 업데이트 이후 유저 데이터다. 신규 스킬 3개 추가했다. 10레벨부터 사용 가능. 밸런스 완벽하게 잡았다고 생각했다. 스킬 사용률 컬럼을 봤다. 7%. 다시 봤다. 7%가 맞다. "뭐지?" 3개월 동안 기획했다. 수치 시뮬레이션 50번 넘게 돌렸다. 테스트 플레이도 했다. QA팀도 재밌다고 했다. 유저들이 환호할 줄 알았다. 7%다. 93%의 유저는 스킬이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기획자의 착각 회의실로 갔다. PD한테 물었다. "스킬 사용률 보셨어요?" "봤어. 왜 이래?" "제가 그걸 알면 여기 안 왔죠." 데이터를 펼쳤다. 유저 레벨별 스킬 사용률이다.레벨 10~15: 3% 레벨 16~20: 8% 레벨 21~25: 12% 레벨 26~30: 18%레벨 30 넘어가면 좀 쓴다. 그것도 20%가 안 된다. "스킬 강하잖아요. DPS 계산해보면 기본 공격보다 30% 높은데." "그럼 유저가 멍청한 건가?" 아니다. 유저는 멍청하지 않다. 내가 멍청한 거다. 기획자는 착각한다. 내가 만든 시스템을 유저가 당연히 이해할 거라고. 튜토리얼 한 번 보면 다 알 거라고. 수치가 좋으면 당연히 쓸 거라고. 틀렸다. 유저는 게임을 플레이한다. 시스템을 공부하지 않는다. 숫자를 계산하지 않는다. 그냥 느낌으로 누른다. 익숙한 걸 누른다. 새로운 건 귀찮다. 나는 3개월 동안 스킬 밸런스를 고민했다. 유저는 3초 동안 '이거 뭐지?' 하고 넘어간다. 격차가 이렇게 크다. 데이터를 뜯어보니 점심 먹고 돌아왔다. 데이터를 더 파봤다. 로그를 봤다. 유저 플레이 패턴이다. 프레임 단위로 찍혀 있다. 10레벨 유저 100명을 무작위로 뽑았다. 패턴이 보였다. 대부분 유저는 스킬 창을 안 연다. 연다고 해도 1초 보고 닫는다. 스킬을 등록하는 유저는 20%다. 등록해도 안 쓴다. 퀵슬롯에 등록하는 유저는 5%다. "아." 문제를 찾았다. 스킬이 약해서가 아니다. 유저가 스킬을 발견하지 못한다. UI를 봤다. 스킬 창은 메뉴의 세 번째 탭이다. 캐릭터 정보 탭 안에 숨어 있다. 아이콘이 작다. 신규 알림도 없다. 튜토리얼을 봤다. 스킬 설명은 15단계 중 11번째다. 텍스트로 설명한다. "레벨 10이 되면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게 끝이다. 유저는 튜토리얼을 스킵한다. 11단계까지 안 본다. 봐도 기억 안 한다. 나는 유저가 게임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플레이할 거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예상 vs 현실 기획서를 꺼냈다. 3개월 전에 쓴 거다. "스킬 시스템 기획서 v2.3" 목표 항목을 봤다.레벨 10 유저의 60%가 스킬 사용 스킬 사용 시 전투 만족도 상승 과금 유저의 스킬 강화 유도예상이었다. 현실은 이렇다.레벨 10 유저의 3%가 스킬 사용 대부분 유저는 스킬이 있는지 모름 과금은 커녕 존재 자체를 인식 못함기획 의도를 읽었다. "유저들이 레벨 10이 되면 전투가 지루해집니다. 스킬 시스템으로 전투에 깊이를 더하고 성장 동기를 부여합니다." 맞는 말이다. 의도는 좋았다. 실행이 망했다. 나는 유저가 이렇게 플레이할 거라고 상상했다.레벨 10 달성 스킬 해금 알림 확인 스킬 창 열어서 확인 강한 스킬 선택해서 등록 전투에서 사용 "오 재밌네" 하고 계속 사용실제로는 이렇다.레벨 10 달성 다음 퀘스트 진행 끝스킬? 본 적도 없다. 나는 게임을 100시간 플레이한 사람의 시점으로 기획했다. 유저는 1시간 플레이한 사람의 시점으로 게임한다. 간극이 이렇게 크다. 왜 안 쓰는가 데이터를 더 파봤다. 스킬을 실제로 사용한 7%의 유저다. 얘네는 왜 썼을까. 로그를 분석했다.길드 가입자: 스킬 사용률 35% 커뮤니티 활동 유저: 스킬 사용률 28% 친구 3명 이상: 스킬 사용률 22% 혼자 플레이: 스킬 사용률 1%보인다. 스킬을 쓰는 유저는 누군가한테 들었다. "야 레벨 10 되면 스킬 써봐. 개쩐다." 게임이 알려준 게 아니다. 다른 유저가 알려줬다. 나는 게임 내 시스템으로 유저를 교육할 수 있다고 믿었다. 틀렸다. 유저는 게임을 믿지 않는다. 다른 유저를 믿는다. 튜토리얼은 스킵한다. 친구 말은 듣는다. 그럼 93%의 유저는? 친구가 없거나 커뮤니티 안 한다. 혼자 조용히 게임한다. 스킬이 있는지도 모른다. 더 파봤다. 스킬을 발견했지만 안 쓰는 유저들이다. 20%쯤 된다. 이유를 찾아봤다. 로그를 봤다. 스킬 창을 열었다. 5초 봤다. 닫았다. 안 썼다. 왜? 스킬 설명을 봤다. "적에게 150%의 피해를 주고 3초간 기절시킵니다. 쿨타임 12초. 마나 소모 45." 나는 이게 명확하다고 생각했다. 유저는 이렇게 생각한다. "150%가 뭔데? 지금보다 강한 건가? 기절이 필요한가? 쿨타임 12초면 긴 건가? 마나 45면 많은 건가?" 비교 대상이 없다. 유저는 판단할 수 없다. 그래서 안 쓴다. 익숙한 게 편하다. 나는 숫자를 주면 유저가 계산할 거라고 생각했다. 유저는 계산 안 한다. 느낌으로 판단한다. 느낌이 안 오면 안 쓴다.긴급 회의 오후 3시. PD가 불렀다. "이거 어떻게 할 건데?" "UI 수정하고 튜토리얼 바꿔야 될 것 같아요." "시간 얼마나?" "2주요." "다음 주 업데이트 있는데." 알고 있다. 다음 주 업데이트는 신규 던전이다. 2개월 작업했다. 이것도 중요하다. "스킬 사용률 이대로 두면 신규 던전 밸런스 다 깨져요." 신규 던전은 스킬 사용 기준으로 난이도를 잡았다. 스킬 안 쓰면 클리어 불가능하다. 유저가 스킬을 안 쓰면 던전을 못 깬다. 리뷰 폭탄 맞는다. "그럼?" "던전 난이도 낮추고 스킬 튜토리얼 먼저 넣어야죠." PD가 한숨 쉬었다. "개발팀한테 얘기해봐." 개발팀장을 찾아갔다. 사정했다. "UI 수정 급하게 부탁드립니다." "뭐 또?" "스킬 아이콘 크게 하고 알림 팝업 넣어야 돼요." "다음 주 빌드 올라가는데?" 알고 있다. 미안하다. 기획을 잘못했다. "꼭 필요합니다." 개발팀장이 담배 피우러 갔다. 돌아와서 말했다. "이번 주 야근 각오해." 고맙다. 미안하다. 수정 작업 화요일. UI 수정안을 그렸다. 변경 사항:레벨 10 달성 시 스킬 강제 튜토리얼 스킬 아이콘 2배 크기 신규 스킬 빨간 점 표시 퀵슬롯 등록 가이드 첫 사용 시 데미지 비교 표시시안을 그렸다. 아티스트한테 넘겼다. 급하게 작업 부탁했다. 스킬 설명도 바꿨다. 기존: "적에게 150%의 피해를 주고 3초간 기절시킵니다." 수정: "일반 공격보다 2배 강합니다! 적을 기절시켜 안전하게 싸우세요." 숫자를 뺐다. 비교 표현을 넣었다. 유저는 "2배"를 이해한다. "150%"는 모른다. 개발팀이 구현했다. 목요일에 테스트 빌드 나왔다. QA팀이 돌렸다. 버그 3개 나왔다. 수정했다. 다시 테스트했다. 통과했다. 금요일 오전. 업데이트 준비 완료. 오후 2시. 배포했다. 데이터를 기다리며 주말이 지났다. 월요일 아침이다. 출근했다. 커피 뽑았다. 손이 떨렸다. 엑셀 열었다. 주말 데이터다. 스킬 사용률 컬럼을 봤다. 38%. 다시 봤다. 38%가 맞다. 레벨별로 봤다.레벨 10~15: 35% 레벨 16~20: 42% 레벨 21~25: 45%올랐다. 7%에서 38%다. 5배 이상 증가했다. 유저 리뷰를 봤다. "레벨 10 되니까 스킬 주네요. 개쩔어요." "튜토리얼이 친절해졌네. 전엔 몰랐는데." "스킬 쓰니까 전투가 재밌어요." PD한테 보고했다. "스킬 사용률 38%입니다." "잘했네." "목표가 60%였는데." "그래도 올랐잖아." 맞다. 올랐다. 5배 올랐다. 근데 목표의 절반이다. 나는 완벽한 밸런스를 만들었다. 유저는 발견하지 못했다. UI를 고쳤다. 유저가 사용했다. 깨달았다. 기획은 밸런스가 아니다. 발견이다. 아무리 좋은 시스템도 유저가 모르면 없는 거다. 숫자가 완벽해도 유저가 안 쓰면 의미 없다. 유저는 게임을 공부하지 않는다. 그냥 논다. 자연스럽게 발견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거다. 나는 3개월 동안 밸런스를 잡았다. 정작 중요한 건 "유저가 찾을 수 있는가"였다. 남은 문제 화요일. 추가 데이터를 봤다. 스킬 사용률은 38%에서 멈췄다. 더 안 올라간다. 나머지 62%는 왜 안 쓸까. 로그를 파봤다. 튜토리얼을 스킵한 유저들이다. 30%쯤 된다. 튜토리얼 자체를 안 봤다. 당연히 스킬도 모른다. 강제 튜토리얼인데 어떻게 스킵하나? 유저는 방법을 찾는다. 빠르게 클릭해서 넘긴다. 화면 안 보고 터치한다. 유저를 과소평가했다. 유저는 생각보다 게임을 안 본다. 나머지 32%는 튜토리얼을 봤다. 스킬도 안다. 그래도 안 쓴다. 왜? 유저 레벨을 봤다. 대부분 5~8레벨이다. 아직 10레벨이 안 됐다. 튜토리얼을 봤지만 스킬을 못 쓴다. 10레벨이 되면 잊어버린다. "아." 또 문제를 찾았다. 튜토리얼 타이밍이 틀렸다. 레벨 1에 스킬을 설명한다. 유저는 레벨 10에 쓴다. 9레벨의 간격이 있다. 유저는 잊어버린다. 수정안을 썼다. 튜토리얼을 레벨 10 달성 직후로 옮긴다. 바로 스킬을 쓰게 한다. PD한테 보고했다. "튜토리얼 타이밍 수정 필요합니다." "또?" "사용률 60% 만들려면 필요해요." 한숨 쉬었다. 승인했다. 개발 일정 잡았다. 다음 주 업데이트다. 또 야근이다. 배운 것들 수요일 저녁. 혼자 남아서 데이터를 봤다. 3개월 작업했다. 1주일 만에 갈아엎었다. 아직도 목표 달성 못 했다. 뭘 배웠나. 첫째, 유저는 숫자를 안 본다. 느낌으로 판단한다. "150% 데미지"보다 "2배 강함"이 낫다. 비교 대상을 명확하게 줘야 한다. 둘째, 유저는 게임을 공부 안 한다. 자연스럽게 발견되게 만들어야 한다. 숨겨진 시스템은 없는 시스템이다. 셋째, 튜토리얼은 타이밍이다. 너무 빠르면 잊어버린다. 필요한 순간에 알려줘야 한다. 넷째, 기획자의 예상은 틀린다. 항상 틀린다. 데이터로 검증해야 한다. 출시 전에 알 수 없다. 다섯째, 유저는 기획 의도를 모른다. 관심도 없다. 그냥 재밌으면 한다. 재미없으면 안 한다. 여섯째, 완벽한 밸런스보다 명확한 UI가 낫다. 발견되지 않는 밸런스는 의미 없다. 일곱째, 유저 간 소통이 게임보다 강하다. 친구 말을 듣는다. 게임 설명은 스킵한다. 여덟째, 혼자 플레이하는 유저가 대부분이다. 이들을 위한 가이드가 필요하다. 아홉째, 기획서는 가설이다. 출시는 실험이다. 데이터는 결과다. 틀리면 수정한다. 열째, 야근은 기본이다. 2주 후 스킬 사용률이 52%가 됐다. 목표 60%보다 낮지만 나쁘지 않다. 절반 넘는 유저가 쓴다. 신규 던전 클리어율도 괜찮다. 스킬 쓰는 유저는 90% 클리어한다. 안 쓰는 유저는 30%다. 리뷰는 좋아졌다. "전투가 재밌어졌어요." "스킬 짱이에요." 나쁜 리뷰도 있다. "스킬이 복잡해요." "설명이 부족해요." 맞다. 아직 부족하다. PD가 말했다. "다음 업데이트 때 스킬 2개 더 추가해." 또 시작이다. 기획서를 펼쳤다. 이번엔 다르게 해야 한다. 유저 관점으로 생각했다. 숫자가 아니라 느낌으로. 발견을 먼저 고민했다. 밸런스는 그다음이다. 기획서 첫 줄에 썼다. "유저는 이 스킬을 어떻게 발견하는가?" 이게 먼저다.계획은 항상 무너진다. 데이터 앞에서 겸손해진다.